[공연]살인사건 범인은 누구? 관객한테 물어봐!

  • 입력 2008년 9월 11일 02시 58분


관객들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을 심문하고 설문조사로 범인을 결정하는 연극 ‘쉬어 매드니스’. 수사관을 맡은 배우가 범인을 심문하기 위해 관객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 제공 뮤지컬해븐
관객들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을 심문하고 설문조사로 범인을 결정하는 연극 ‘쉬어 매드니스’. 수사관을 맡은 배우가 범인을 심문하기 위해 관객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 제공 뮤지컬해븐
관객이 그날의 주인공을 고르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 후보 중 연하남 로미오(장우진·왼쪽)와 터프한 줄리엣(서예희). 사진 제공 껌아트홀
관객이 그날의 주인공을 고르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 후보 중 연하남 로미오(장우진·왼쪽)와 터프한 줄리엣(서예희). 사진 제공 껌아트홀
스토리 전개-주연배우 관객이 결정… “이젠 보는 관객서 참여하는 관객 시대로”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줄리엣 누나. 이젠 말할게요. 저 3번 로미오라고.”

“지가 200 대 1의 오디션도 합격했는디 뒤에 있는 3명을 못 누르것슈?”

5일 저녁 서울 대학로 껌아트홀.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무대에 7명의 남녀 배우가 등장한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02-766-2022)에서 주인공을 ‘맡을지도 모를’ 후보들. 남자 주인공 로미오 후보로는 섹시형과 연하남, 그리고 ‘오버’형 남자 배우가, 여자 주인공 줄리엣 역에는 터프한 스타일과 호들갑형,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줄리엣, 콧대 높은 도도한 줄리엣이 등장해 관객들에게 자신을 주인공으로 뽑아 달라고 호소하는 이색 풍경이 벌어진다. 이 연극은 관객이 그날 공연할 배우를 즉석 투표를 통해 고른다. 부제는 ‘오늘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골라주세요!’

이젠 관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날 공연의 주인공도, 배우 캐스팅도, 심지어 작품의 결말까지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남녀 배우의 조합에 따라 12쌍의 커플이 가능한데 이날은 ‘연하남 로미오와 사투리 줄리엣’ 커플이 탄생했다. 주인공에 선택되지 못한 나머지 배우는 친구 사촌 등 조연을 맡거나 가로등이나 달 같은 무대 배경이 되어야 한다.

이 같은 설정에 관객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황선미 씨는 “고전극을 현대적으로 개성 있게 표현한 것 같아 좋았다. 다른 배우의 조합으로 꾸며진 공연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배우들은 몇 배로 힘이 든다. 로미오 후보 중 한 명인 배우 노승탁 씨는 “줄리엣을 제외한 모든 역을 연습해야 하기 때문에 10여 개 배역을 모두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충은 또 있다. 이 때문에 가족 친구를 함부로 초대하기 어렵다는 것. 한 배우는 “초대한 날에 주인공이 안 되고 가로등 역을 하고 있다면 그건 정말 큰 망신”이라며 “가족과 친구들을 한날 초대해 나를 주인공으로 뽑게 할 것”이라는 ‘비책’을 내놓기도 했다.

대학로에서 오픈런(무기한)으로 공연 중인 연극 ‘쉬어 매드니스’(02-501-7888)는 관객이 결말을 결정한다. 미용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과정을 다룬 이 연극은 1막에서는 사건이 전개되고 2막에서는 관객이 직접 연극에 참여해 극중 수사관과 함께 용의자를 ‘심문’한다. 심문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수사관을 맡은 배우가 관객들의 의견을 물어 다수결로 그날의 범인을 결정하고, 배우들은 이에 맞게 결말을 연기하는 식이다.

‘쉬어 매드니스’의 마케팅 팀장인 안샘 씨는 “관객 참여가 적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관객들이 너무나 적극적으로 공연에 참여하기를 원해 놀랐다”며 “이어지는 관객들의 질문 때문에 공연 시간이 길어질 정도”라고 말했다.

이 작품 역시 관객의 결정에 따라 각각의 범인이 나올 수 있는 만큼 배우들은 각 결말을 모두 준비해 두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쉬어 매드니스’처럼 결말이나 배우 조합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만큼 관객들은 매번 다른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중복 관람을 하는 경우가 많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기획을 맡은 김수호 씨는 “다른 캐릭터를 궁금해하는 관객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공연 진행 한 달 후인 10월 5일부터 티켓을 가져오면 50% 할인을 한다”고 말했다.

2년째 롱런 중인 인기 뮤지컬 ‘김종욱 찾기’(02-501-7888)는 초연 당시 공연 기획 단계부터 관객들이 배우 캐스팅을 결정하도록 한 작품이다. 당시 오만석 오나라 씨가 관객들의 투표를 통해 캐스팅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관객들이 객석에 앉아 수동적으로 공연을 지켜보거나 배우의 지도에 따라 공연장의 흥을 돋우는 수준이 아니라 공연을 직접 지휘하는 존재로 떠오르고 있는 셈. 대학로 공연기획자 손상원 씨는 “요즘 관객들은 2시간 내내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는 대신 적극적인 역할을 원하는 것 같다”며 “점점 더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이 늘어나는 현상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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