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전후 일본무대 서양고전의 재해석…‘본격소설’

  • 입력 2008년 9월 13일 01시 54분


◇본격소설/미즈무라 미나에 지음·김춘미 옮김/484(1권), 444(2권)쪽·각 1만2000원·문학동네

미국 뉴욕 교외 롱아일랜드. 일본인 이민자인 여고생 미나에는 유복한 가정환경에도 항상 쓸쓸하다. 미국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향수만 가득한 그녀. 우연히 알게 된 부잣집 운전사 아즈마 다로에게서 묘한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 세월이 흐르며 미나에의 가세가 기우는 사이, 아즈마는 무서운 수완으로 엄청난 부자로 성장한다.

또다시 지나간 시간, 미나에는 아즈마가 미국 사업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행적을 안다는 가토 유스케라는 청년이 찾아온다. 그가 전하는 일본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후미코라는 여인에게서 들었다는 아즈마에 관한 놀라운 사연. 미나에는 청년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리라 결심한다.

‘본격소설’은 액자소설이다. 본편이 아즈마와 비련의 여인 우타가와 요코를 둘러싼 운명 같은 사랑이라면, 이를 후미코가 유스케에게 들려주는 방식이다. 다시 이를 자신이 아즈마와 관련 인물을 만난 경험을 보태 미나에에게 전하는 유스케의 이야기나 그에 앞선 미나에의 추억은 애피타이저 격이다. 삼중 사중 액자쯤 된다.

소설 구조 역시 어디선가 본 듯 낯익다. 아즈마가 히스클리프라면 요코는 캐서린, 요코 남편이 에드거 린턴. 작가도 ‘선행(先行) 작품’이라 말했듯 그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이 일본이란 무대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고전의 ‘재해석’이나 원작의 ‘토착화’가 이뤄진 셈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카피나 표절로 볼 필요는 없다. 원작에서 구조만 차용했을 뿐 내용은 전혀 다르다. 특히 소설의 매력은 ‘전후 일본사회’라는 시대적 배경에 있다. 전쟁에 패망한 뒤 황폐했던 모습과 이를 딛고 기적처럼 부흥한 경제적 호황, 그리고 버블경제의 그림자까지. 등장인물과 화자의 삶 속에 자연스레 시대의 흐름이 뒤섞이며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게다가 폭풍의 언덕이 아니더라도 소설은 구석구석 고전적 향취가 가득하다. 읽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어린 시절 대목은 황순원의 ‘소나기’가 연상되고, 성공한 아즈마의 귀환은 ‘위대한 개츠비’가 떠오른다. 한가위 고향집에 내려갔다 할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던 세계문학전집을 꺼내 읽은 기분이랄까. 그런데도 먼지 쌓인 퀴퀴함보단 옛 시절 우물물을 길어 올린 듯 상쾌함이 넘친다. 다만 메인 스토리가 상권 후반부나 가야 ‘본격적으로’ 시작해 감질날 수도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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