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경쟁상대인가, 꼭 필요한 우군인가 아니면 의례적 명절 멤버?
서울 강남구의 성형외과 의사 A씨는 지난 8월 20대 초반 여성에게서 ‘특이한 수술 의뢰’를 받았다. 또래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다짜고짜 자신의 수술 성공 여부를 말해달라고 했던 것. 사진 속 여성보다 더 예쁘게 코 성형을 해달라는 주문과 함께 말이다.
“수술 전후 옆모습과 앞모습 사진을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했더라고요. 코의 돌출 각도(이마와 코의 각도)와 코 길이는 물론, 성형에 쓰인 재료가 자가 연골조직인지 고어텍스인지 알려달라는 거예요. 황당했죠.”
상담 결과 사진 속 여성은 의뢰인보다 한 살 많은 사촌 언니였다. 사촌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해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지난 설에 코 성형을 하고 나타나 친척들에게 예뻐졌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결국 A씨는 ‘추석 데뷔전’을 위해 코 성형을 했다고 한다.
평소 멀리 떨어져 지내다 명절 연휴 때나 모이는 친척. 현대인에게 친척은 어떤 의미일까. 코 성형 ‘따라쟁이’를 만드는 경쟁 상대일까, SOS 요청 1순위인 피붙이일까, 아니면 집안 대소사를 함께하는 의례적 관계일까. 현대인의 친척관을 들여다봤다.
# 재산에 울고 웃고
중소 전자업체를 운영하는 김모(68) 씨는 최근 10여 년간 사업이 성공하면서 친척들이 자주 모이게 된 사례다. 4남3녀 중 둘째인 김씨는 번 돈의 5%를 ‘친척 인재개발비’로 사용했다. 사촌과 조카들의 대학 이상 학자금 및 유학비용을 댄 것.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면 학자금, 유학을 가면 최대 3년치 학자금과 생활비(월 1500달러)를 대줬다. 10년이 흐르면서 조카 12명 중 10명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석사학위를, 그중 5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은 김씨 회사에서 연구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아이들의 교육비를 대주니까 형제자매들이 열심히 일하고, 조카들도 성실히 공부했다”면서 “2년 전부터는 처가 식구들에게도 인재개발비를 지급하고 있다”며 웃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친척 모임도 항상 전원 참석이라고.
부산지방법원 민사13단독 채시호 판사는 8월26일 한 소송의 판결문에 이례적으로 ‘후기(後記)’를 적었다. 이 소송은 작고한 Y기업 설립자의 장남이 빚을 갚기 위해 회사 주식을 제3의 인물에게 판 것에 대해 설립자의 사위이자 Y기업 공동대표인 B씨가 무효라며 제기한 법정 다툼이었다. 피고(사위) 측은 장남이 정신이 혼미한 어머니를 설득해 주식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한 행위인 만큼 주식거래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결국 채 판사는 장남의 손을 들어줬지만 후기를 통해 이렇게 적었다.
“자식과 사위의 싸움을 지켜보는 할머니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부디 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데리러 올 때까지 여생을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만 생각하고, 지금의 자녀들이 아니라 옛날의 착하고 어린 아기들만 생각하길….”
※숭실대 정재기 교수(정보사회학)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27개국 3만4544명의 설문 결과를 비교, 분석한 뒤 한국에서만 부모의 소득이 많을수록 자녀와 자주 만난다는 특소성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발표한 ‘한국의 가족 및 친족간의 접촉 빈도와 사회적 지원의 양상 : 국제간 비교’ 논문에서다. 논문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부모 소득이 1% 늘어나면 자녀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날 확률이 2.07배 이상 높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4개 회원국은 오히려 부모 소득이 많을수록 대면 접촉이 줄었다.
# 왕이모는 있어도 왕고모는 없다?
초등학교 1학년 딸을 둔 회사원 최성욱(37) 씨는 최근 아내의 말에 ‘깼다’. 2학기 시작과 함께 날아온 알림장을 보고 ‘학부모 교실 청소’에 참가한 최씨의 아내.
“엄마들이 조를 짜 보통 한 달에 한 번 교실 청소를 한다고 해요. 그날 ‘조장(각 조의 연락담당) 엄마’가 청소도 청소지만 선생님도 한번 뵙자고 해서 갔는데….”
선생님은 청소를 마친 엄마들과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시계는 거꾸로 돌아, 며칠 전 수업시간. 추석을 주제로 수업하던 중 선생님이 최씨의 딸(7)에게 질문을 했다.
“엄마의 언니를 뭐라고 부르나요?”(선생님) “이모요. 우리 이모 정말 예뻐요.”(딸)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요, ‘아빠의 여동생’과 ‘아빠의 오빠’(큰아버지를 지칭한 듯)는 농부예요. 멀리 사세요.”
선생님은 아빠의 여동생은 고모라고 일러줬는데 딸은 ‘고무’ 같다며 친구들과 깔깔댔다고. 최씨의 아내는 순간 ‘시숙, 제수 방에 들어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해요. 제가 차남인데 고향(전남 영암군)에 자주 내려가지 못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딸아이는 서울에 사는 이모가 많이 돌봐줬어요.”
그는 “육아 때문에 ‘왕고모는 있어도 왕이모는 없다’는 옛말은 이제 바뀐 거 같다”며 웃었다.
“회사 앞에도 ‘이모 식당’은 있는데 ‘고모 식당’은 없잖아요.”
※서울대 왕한석 교수(인류학)의 논문 ‘친척 관련 속담의 민족지적 연구’(사회언어학 제10권 1호, 2002)를 보면 흥미롭다. 그는 전통적인 반촌(班村) 사회인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1년여 체류하면서 그곳 주민의 일상적인 언어생활 모습을 관찰했다. 그 결과 개평리는 존댓말, 호칭어, 친척 용어 등 호칭체계(address system)가 다른 조사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발달해 있었고, 속담의 주제도 친척(kinship)과 관련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다(채집된 속담 60수 가운데 40수가 친척과 관련됐다). 반면 민속언어(folk speech)나 전설, 민담(folktale)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왕 교수는 개평리라는 언어공동체의 사회조직적 특성, 다시 말해 위계적이고 친척들이 많이 모여 사는 개평리의 사회조직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 처삼촌(妻三寸) 묘 벌초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