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에 공식은 없다.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길을 닦는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오늘'을 만든 경쟁력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각 분야 다양한 사람들을 특별하게 만든 '비법'을 들어보는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
① 김창완 '죽을 만큼 노력'-"만능 재주도 노력의 산물"
"어떻게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하고 작곡도 하고 글도 쓰냐고? 당연히 노력이다.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끌어내는 사람은 드물다. 난, 죽을 만큼 노력한다."
노력…. 뻔한 이야기다. 누군 몰라서 못하나. 하지만 워낙 타고난 재주가 많아 여러 분야를 섭렵하는 줄 알았던 '만능 재주꾼'한테서 "난 죽을 만큼 노력한다"는 말을 듣는 건 좀 달랐다.
모차르트 과(科)인 사람이 "난 사실은 살리에리 과"라고 털어놓는 고백을 듣는 것만 같다. 사실 우리 대다수는 살리에리의 운명을 타고났다. 죽도록 애를 써도 최상에 도달하지 못해 좌절로 밤을 새는 살리에리.
하지만 그 '죽을 만큼의 노력'을 거쳐야만 우리가 오늘 누리는 아름다운 것들이 비로소 태어난다. 1977년 데뷔한 뒤 30년이 넘도록 김창완이 대중에게 전해온 따뜻한 위로, 편안함, 반짝이는 즐거움 뒤에는 자신의 완전 연소를 꿈꾸는 한 예술가의 "죽을 만큼의 노력"이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 작은 공연이 끝난 뒤, 팬들의 환호가 지나간 뒤. 해가 뉘엿뉘엿 지던 때 서울 서초구 방배동 '카페 골목'의 한 막걸리 집에서 김창완(54)이 밴드 멤버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 함께 했다. 막걸리 집 개 '만길'의 자식이 동네에 몇 마리인지 알만큼 김창완은 이 집의 오랜 단골이다.
그를 '누구'라고 정의해야 할까. '산울림'으로 모던 록의 도래를 알리며 등장한 뒤 30여 년간 그는 한 번도 같은 모습이었던 적이 없다.
작곡 작사 연주를 다 하는 가수로 출발해 현대극과 사극을 넘나드는 TV 탤런트, 영화배우로 폭을 넓히는가 싶더니 뮤지컬 작곡가, 산울림 13집까지 음반 표지를 직접 그린 화가,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를 펴낸 작가, MC의 면모를 두루 보여주었다.
집에는 그가 직접 조각한 작품 '허무한 손'이 있다고도 했다. 대중예술 가운데 그가 건드리지 않은 분야는 '댄스' 정도가 아닐까.
현재 김창완 밴드와 함께 새 앨범을 녹음 중인 그는 매일 아침 2시간씩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면서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가 다시 손잡고 만드는 신작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도 촬영 중이다. 나이를 잊게 하는 바쁜 일상이다. 그와 함께 앉아있던 동안에도 작곡을 의뢰하거나 공연을 부탁하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데뷔 30년이 넘은 지금도 '김창완은 누구'라고 정의되면 항상 깨고 싶어집니다. 록 밴드 가수라고 굳어져 갈 즈음에 '산울림 동요왕국'을 냈죠. 착한 연기가 어울린다고들 할 때 드라마 '하얀 거탑'의 악역 우용길을 선택했습니다. 현대극 배우로 안주하는 것 같아 사극 '일지매'에 도전했구요."
"처음부터 박수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산울림'이 처음 나왔을 때 이게 무슨 노래냐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 사람들이 '김창완'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기 시작한 거죠."
경계 없이 영역을 확장해가는 비결이 노력이라고만 하기엔 재주가 많아 보인다고 하자 그는 뭘 모르는 소리라는 듯 웃었다.
"뮤지컬 '반 고흐와 해바라기'를 작곡할 때 곡 14개를 3일 만에 만들었어요. 겉으로만 보면 '3일 만에 14개를? 와, 쉽게 하네!' 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는 그 3일간 거의 잠을 잔 기억이 없어요. 어떤 일을 할 땐 그 일 말고 세상에서 내게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집중해서 그것만 파고들어야 해요."
힘주지 않는 그의 편안한 연기도 노력에서 나온 것일까. '가수' 김창완 못지않게 '배우' 김창완을 아끼는 사람도 많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감독 손에서 탄생하는 작품이지만 캐릭터를 살아 숨쉬는 인물로 만드는 것은 연기자입니다. 대본을 오래 연습하진 않아요. 대신 이 인물이 왜 하필 이 대목에서 이렇게 행동할까, 왜 저런 말을 내뱉을까 하는 점을 연구합니다. 인물의 필연성을 따져보고 계산해 스스로 납득하고 몸에 배도록 하지 않으면 제가 그 인물을 '살아낼 수' 없지요. '하얀 거탑'의 우용길 부원장, '커피 프린스 1호점'의 홍사장이 다 그렇게 탄생한 사람들이예요."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자 단정했던 그의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서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을 읽어내는 더듬이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쓸어 넘기며 그는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대중 앞에 서는 사람들에겐 외로움이 천형 같다"고 말했다.
"여기 밴드 멤버들도 있지만 공연이 끝날 때마다 허무해서 술을 마십니다. 여기 우리가 노래하는 장면이 있어요. 이 장면 뒤에는 어마어마한 과정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르죠.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건 혼자 견뎌내야 하는 일입니다. 대중 앞에 서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외로움을 견뎌내야 해요."
갑자기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창익이가 떠났지만 무대를 보는 누구도 그 사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내 동생의 빈자리를, 내 옆의 빈자리를 아무도 몰라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한 섣부른 위로는 상처만 될 뿐….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중학교 2학년생부터 마흔이 훌쩍 넘은 중년까지 그를 친근하게 '아저씨'라고 부르며 안부 인사를 남긴다. 가수 연기자 작가 등 팬들이 사랑하는 그의 얼굴도 갖가지다. 하지만 그는 뭐니뭐니해도 "나는 가수"라고 단언했다.
음반을 사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인터넷 시대. 가수로 살아가는 일이 앞으론 가능하기나 할까.
"그래서 정말 음악에 미친 후배 가수들에게는 가난할 각오를 하라고 요즘 말하고 다닙니다. 20년 전만 해도 '가난한 시인' 운운할 땐 나는 왜 가난이 예술의 조건이냐고 따지곤 했는데…. 그 때보다 경제는 훨씬 좋아졌지만 예술가에겐 시계가 거꾸로 돌아 가난이 운명이 되어버렸으니…."
그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사람들이 콘텐츠에 대한 대가를 전혀 지불하려 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몇 십억 예산을 생색내며 예술가들에게 던져주지 말고 5400억 원대에 이르는 불법 다운로드 시장을 단속하면 됩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바라는 것이지 적선을 바라는 게 아니예요."
세상의 기대치에서 반발자국씩 비켜서면서 새로운 모습을 창조해왔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대학 1학년 때 기타를 처음 사서 노래를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도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손가락 하나 들기 힘든 할아버지가 되어도 기타치고 노래할 거예요. 우리 밴드와 함께 '에어로 스미스 (Aero smith)'처럼 늙고 싶어요."
그는 이번에 만드는 앨범은 "라이브처럼 한 번에 녹음을 끝낼 생각"이라고 했다. "밴드 음악의 기본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몇 차례의 무난한 연주에서 잘 된 것만 골라 잇는 편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무섭게 집중하는 맨얼굴의 라이브. 그에겐 음악도, 삶도 '맹렬한 몰두로 빚어내는 '라이브'였다.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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