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가슴에, 어떤 이는 등에 각각 7과 6이란 숫자가 그려져 있다. 다른 이는 얼굴에, 또 다른 이는 종아리에 커다란 숫자를 칠했다. 그들 뒤편에 분단을 상징하는 휴전선 철책이 어렴풋이 보인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몽인아트센터에서 전시 중인 미야지마 다쓰오의 사진작업 ‘카운터 스킨(Counter Skin at 38° in South Korea)’ 시리즈다. 사진 속 인물 10명은 나이와 출신지역, 직업 등을 고려해 선정된 한국의 일반 시민. 자원해 참여한 이들은 자기 삶과 밀접한 숫자와 자신이 원하는 신체 부위를 골랐고, 작가는 이를 보디페인팅한 뒤 사진으로 촬영했다. 참여자의 ‘맨몸’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평화의 메시지는 인위적 ‘경계’와 대비되면서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야지마는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의 작가로 참여하면서 국제적으로 주목받아 온 작가. 그의 작업엔 죽음을 뜻하는 0을 제외하고, 1∼9의 숫자가 늘 등장한다. 생일부터 온갖 기념일을 거쳐, 죽을 때까지 숫자는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숙명이 돼버렸다. 작가에게 숫자는 유한하면서 무한 반복되는 사람의 삶과 생명을 뜻하며,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보편적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 같은 보편성에 장소성과 역사적 맥락을 덧붙여 온 작가는 일본 히로시마와 독일 레클링하우젠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적 상황을 부각하기 위한 일반인 참여 프로젝트를 펼쳤다. 각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는 힘주어 말한다. 피부와 국적은 달라도 보편적 삶의 모습은 동일하다는 것을.
사진과 더불어 한국인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작업이 있다. 1층 전시장의 깊은 어둠 속에서 끝없이 바뀌고 점멸하는 숫자가 담긴 발광다이오드(LED) 설치작업 ‘Far Line 38’. 숫자를 담은 LED가 길게 이어진 띠는 38선이라는 역사적, 정치적 장벽을 상징한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경계를 넘어 인간이 만나는 것을 표현한 작업은 고요한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 전시는 11월 2일까지. 02-736-1446
안산시 경기도미술관에서 최근 공개된 강익중 씨의 벽화 프로젝트 ‘5만의 창, 미래의 벽’ 역시 예술가와 보통 사람들의 소통과 교감으로 완성된 작업이다. 미술관 1, 2층 통로의 벽을 뒤덮은 가로 72m, 세로 10m 크기의 대형 벽화는 작가와 일반 사람들의 열정으로 실현된 공동 프로젝트. 최남단 마라도부터 민통선 마을까지 전국의 어린이 5만 명이 보내온 그림(3×3인치)과 오브제로 이뤄졌다.
첫 단추는 ‘아름다운 기부’에서 시작됐다. 작가 강 씨는 경기도미술관에 자신의 작품 구입대금을 어린이를 위한 뜻 깊은 프로그램에 써 달라고 기증했고, 이것이 아이들의 천진한 꿈을 통해 세상의 벽을 뛰어넘기 위한 벽화로 발전한 것. 작가는 “우리 민족에게, 전 세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꿈이다. 어린이 벽화 프로젝트는 큰 어망처럼 네트워크를 만들어 다양한 꿈을 낚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방방곡곡의 어린이들은 ‘나의 꿈’을 주제로 자신이 되고 싶은 것과 가고 싶은 곳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이 ‘꿈’들이 ‘작품’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가공하고 설치하는 데 또 다른 에너지가 보태졌다. 군인부터 장애인, 외국인근로자,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와 지원이 있었던 것. 이렇게 모인 5만의 목소리는 궁극적으로 지구별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우렁찬 합창을 빚어냈다. “작가의 의무는 연결자다. 너와 나를, 과거와 미래를, 동과 서를, 남과 북을 연결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강익중)
온갖 장벽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한데 모여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아름답다. 우리는 인간이란 점에서 닮아 있고,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두 프로젝트. 예술가와 일반인이 더불어 했던 과정이 있어 더욱 빛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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