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인 고(故)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아내와 아들(페루치오 페라가모 당시 페라가모 그룹 회장), 손자와 손녀들이 3대에 걸쳐 전형적인 가족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족끼리 모여 식사하면서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을 한다”고 한가롭게 말하던 페루치오 회장은 이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그 대신 2006년부터 전문 경영인이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내년엔 기업공개(IPO)도 예정하고 있다.
럭셔리 시장이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역시 가족 기업인 ‘프라다’도 상장(上場)을 추진하면서 주식회사로 변화를 꾀한다. 날로 커가는 아시아 시장에 투자할 돈이 필요해서란 분석도 있고, 럭셔리 브랜드를 탄생시킨 가족경영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란 주장도 있다.
‘블루 오션’에서 ‘레드 오션’으로 바뀌고 있는 럭셔리 시장에선 고객과 제품의 차별화가 주도면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상급 고객(VIP)을 위한 하이엔드(최고급) 제품과 서비스는 갈수록 화려해진다. 반면 중산층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럭셔리 브랜드 내 중저가 제품군은 더욱 탄탄하게 확충된다. 신흥 시장인 아시아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다.
우리는 어느새 럭셔리 시장의 일원이 되고 있다. 어엿한 글로벌 브랜드들이 경쟁하는 럭셔리 시장. 그곳에선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럭셔리
루이비통의 한국 법인인 루이비통코리아의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보고서(안진회계법인)에 따르면 1991년 설립된 이 회사는 지난해 1689억 원의 매출을 올려 2006년(1212억 원)에 비해 39.4%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2006년 113억 원에서 지난해 241억 원으로 113.5% 늘었다.
루이비통은 프랑스 럭셔리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브랜드다. LVMH는 ‘루이비통’과 ‘크리스티앙 디오르’, ‘펜디’를 비롯해 ‘모에 샹동’ 샴페인과 ‘태그호이어’ 시계 등 50여 개의 브랜드를 거느리는데, 루이비통의 매출 비중이 이 중 25%다.
거대 럭셔리 브랜드는 세계적 불황에도 건재함을 과시한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LVMH의 올해 상반기(1∼6월) 순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7% 증가한 8억9100만 유로(약 1조3899억 원). 특히 아시아 시장의 매출이 전체 매출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프랑스 은행인 소시에테 제네랄(SG)은 7월 낸 보고서를 통해 “LVMH는 보유 제품군과 지역적으로 모두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다”며 “특히 제품 혁신과 신흥 시장의 새로운 매장 설립으로 전망이 밝다”고 평가했다.
총자산 255억 달러(약 28조3050억 원)로 세계 패션계의 최고 부자이기도 한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럭셔리를 상류층 대상의 ‘명품’에서 대중이 열망하는 기호품으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다.
거듭된 인수합병(M&A) 후 마크 제이콥스와 같은 젊은 디자이너들을 과감히 기용해 파격적인 디자인을 쉼 없이 선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요즘 루이비통 매장에 들어서는 고객들에게서는 과거 럭셔리 고객들의 경건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편의점에서 새로 나온 물건을 찾는 듯한 경쾌함과 가벼움이 느껴진다.
아낌없는 광고 물량, 월급을 모으면 구입할 수 있는 가격대의 가방으로 1990년대 일본의 오피스 레이디들을 열광시키더니, 이젠 중국과 한국 등 신흥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 하이엔드 시계와 럭셔리 보석 브랜드의 만남
영국 경제 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달 초 럭셔리 브랜드들이 하이엔드 시계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최근의 트렌드를 소개했다.
리슈몽 그룹의 대표 브랜드인 까르띠에는 ‘발롱 블뢰(Ballon bleu·푸른 공)’ 시계의 투르비용(Tourbillion·최고급 수동시계에 쓰이는 무브먼트) 버전을 최근 선보였다. 5만4000유로(약 8424만 원)부터 시작하는 이 제품은 다이아몬드로 눈부시게 장식돼 남성용인지, 여성용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지난해 일본 오모테산도(表參道)와 긴자(銀座)에 연이어 매장을 내는 등 투자를 확대한 프란체스코 트라파니 불가리 그룹 최고경영자(CEO)는 하이엔드 시계의 수요층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60세보다는 35세 남자가 하이엔드 시계에 더 관심을 갖는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신흥 시장 고객들이 많다. 이들은 한층 업데이트된 디자인을 찾는다.”
가죽 제품이 전체 포트폴리오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에르메스도 보석과 시계를 꾸준히 내놓는다.
에르메스가 1927년부터 판매해 온 시계의 90%는 쿼츠 시계(복잡한 기계장치 없이 전지로 작동하는 시계)였는데, 몇 년 전부터는 고급 무브먼트 시계 제작으로 선회했다.
샤넬도 1987년 선보인 ‘프르미에르’ 시계를 현대적으로 디자인하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프르미에르 세라미크’ 시계를 10월부터 선보인다.
국내 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시계의 5대 명품’으로 불리는 바슈롱 콩스탕탱, 파테크 필리프, 오드마르 피게, 브레게, 블랑팽 등이 최근 모두 한국에 진출했다.
까르띠에와 오메가도 한국을 주요 시장으로 인식한다.
까르띠에는 이달 말 브랜드 종합매장인 ‘까르띠에 메종’을 아시아 최초로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연다.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미국 뉴욕에 이어 네 번째다. 프라이빗 맨션 스타일의 이 건물에선 ‘스페셜 오더’ 서비스를 통해 고객이 원하는 대로 보석 장신구를 디자인해 준다. 마치 50여 년 전 이 브랜드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특별 제작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는 50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 반지, 인도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하이 주얼리인 ‘앵드 미스테리외즈 컬렉션’ 등이 새롭게 선보인다. 까르띠에와 에르메스 등 요즘 럭셔리 브랜드들의 화두는 온통 ‘아시아’다.
오메가도 이달 초 국내 최초로 청담동에 플래그십 스토어(체험 판매장)를 열고 ‘투르비용 상트랄’ 등 고급 시계들을 판매한다. 그동안 예물시계로 인식되던 오메가를 하이엔드 브랜드로 다시 포지셔닝하기 위해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는 설명이다.
○ 럭셔리 시장의 양극화
패션계의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인 에르메스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2.5% 증가한 16억2510만 유로(약 2조5351억 원)였다. 에르메스는 미술과 영화 등을 지원하는 문화 마케팅으로 하이엔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김주연 에르메스 코리아 부장은 “이제 한두 개쯤 럭셔리 브랜드를 갖추게 된 고객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버킨백’ 등 클래식한 제품을 찾는다”며 “유행 주기가 워낙 빨라 고가(高價)의 클래식 제품을 사는 게 오히려 실속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가격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줄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베블런 효과’는 국내 럭셔리 시장에 완벽하게 적용되고 있다. 골드 체인과 퀼팅 무늬로 대표되는 샤넬의 ‘2.55백’은 지난해 280만 원대에서 올해 330만 원대로 가격이 껑충 올랐지만 여전히 인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핸드백의 가격은 100만 원대였다. 럭셔리 브랜드들은 스테디셀러 제품의 가격을 연간 1, 2회 정도 꾸준히 인상하고 있지만 20대 여대생들조차 이 가방을 갖기 위해 힘겹게 모은 돈을 아낌없이 지불한다.
3억∼5억 원인 이탈리아 스포츠카 ‘페라리’는 고객층이 20대부터 60대까지 골고루 포진한다. 대개 다른 고급 승용차들을 이미 갖춘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차량의 인테리어를 맞춤식으로 제작하기 위해 6개월 정도는 선뜻 기다린다.
페라리는 포뮬러원(F1) 경기가 열리는 각국의 자동차 트랙 경기장에 자사(自社) 고객들을 위한 관람석을 별도로 마련하고, 외국에서 열리는 드라이빙 스쿨에도 전세기를 띄워 고객들을 초대한다.
이 회사 김지은 홍보팀장은 “럭셔리는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꿈과 열정을 주는 것”이라며 “럭셔리 시장의 계층화가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부자들이 점점 더 하이엔드를 찾는가 하면 평범한 중산층도 럭셔리 시장으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다. 이들은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국내 최고의 럭셔리 호텔을 표방한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파크 하얏트 서울’은 하이엇호텔그룹 중 최상위를 차지한다.
덴마크 럭셔리 브랜드인 뱅앤드올룹슨(B&O)의 오디오를 객실에 갖추고, 객실 면적의 3분의 1 정도를 탁 트인 전망의 통유리 욕실에 할애해 마치 근사한 저택에 사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한 번 투숙한 손님이 어느 쪽 베개를 사용하는지, 실내 온도를 몇 도에 맞추는지 일일이 기록해 뒀다가 다음 번 투숙 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울 호텔신라와 그랜드하얏트서울의 스파도 럭셔리 중산층이 즐겨 찾는 장소다. 정갈한 인테리어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고급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여유를 추구하는 럭셔리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정확하게 겨냥한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일찍이 “탐욕을 없애고 싶으면 그 어머니인 사치를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지만, 럭셔리는 이미 우리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와 버렸다. 명확한 사실은 ‘하이엔드’든, ‘대중적 럭셔리’든 럭셔리 시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치밀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지면 디자인=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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