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경험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인버네스에 살던 저자에게는 1971년 1월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가 그런 경험에 해당한다. 사고 현장을 본 그는 해변의 기름을 닦아 내고 원유에 뒤엉킨 바다생물을 살리기 위해 자원봉사에 동참했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지구에 대한 책임감을 확인한다는 뜻에서 자동차를 비롯해 기름으로 움직이는 탈것을 이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고가 난 지 1년쯤 뒤부터 22년 동안 프란시스 씨는 아주 가끔 자전거를 이용한 것 외에는 걸어 다녔다. 남들이 차로 5분 만에 가는 6km 거리를 1시간 동안 낑낑대며 걸었고, 40km 떨어진 친구 집에 놀러갈 때면 하루 전에 출발했다.
걷기를 고집한다는 것만 하더라도 그는 별난 사람이다. 그런데 한술 더 떴다. 1972년 27세 생일 때부터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생일을 기념해 보겠다며 시작한 일이 며칠, 몇 주일, 몇 달로 이어졌고 17년이나 계속됐다.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대신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걷고, 침묵하는 동안 그가 겪은 별별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남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려고 걸어 다니느냐’는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고, ‘걸어 다니다가 침묵까지 하는 걸 보니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징조’라며 겁을 내는 사람들도 만났다.
고행을 두 가지나 한꺼번에 하면서 깨침을 얻은 것인지 프란시스 씨는 현자(賢者)와도 같은 말을 책의 곳곳에서 내뱉는다.
“…걷기와 침묵은 나를 구원해 줬다. 걷기와 침묵은 속도를 늦춰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줬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준다.”
자신이 선택한 세계에 점점 깊이 빠져든 그는 자신의 선택을 적극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어느새 지역의 유명 인사가 된 상황을 활용해 환경보호라는 대의를 널리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태평양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 미국을 횡단해 동쪽으로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감하고, 대학 수업시간에 초청강사로 나서 자신이 그린 그림과 손짓을 통해 자연과 환경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침묵 여행을 하면서도 자신의 취지를 이해한 교수들을 만난 덕분에 그는 과학 학사, 환경학 석사에 이어 위스콘신대에서 토지자원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목표는 점점 커졌다. 책의 중반부에 이르면 저자가 새롭게 설정한 인생 좌표가 확고하게 드러난다.
“항해와 도보로 세계를 일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부의 일환이자,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다.”
그는 1991년에는 유엔환경계획(UNEP)의 친선대사로 임명됐고, 현재는 자신이 1992년 세운 비영리교육기구 ‘플래닛 워커’를 운영하며 도보순례에 기반을 둔 환경교육의 확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1971년 샌프란시스코 만의 사고가 나에게 그랬듯 태안 앞바다의 기름 유출 사고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돼 있을 것”이라며 “이 책의 한국어판을 태안 주민과 자원봉사자들께 바친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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