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태어나 나와 싸우고, 나와 싸워 이겨서 결국 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결국 내가 인생에서 찾아낸 과제이자 해답이었다. 나 자신이 가장 무서운 적이자 동지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비로소 인위적인 나, 가식적인 나를 버리고 자연적인 나를 이해하고 또한 그것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었다.”(표제작 ‘인형의 마을’ 중에서)
어느 날 전해온 지인의 시한부 삶 선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주인공 ‘나’는 책 ‘티벳 사자의 서’를 읽으며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 순간 마음속에 겹쳐지는 역사 속 인물들. 남이 장군과 마리 앙투아네트, 이재명. 그들의 인생은, 그리고 나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일까.
‘인형의 마을’은 올해 등단 20년을 맞은 소설가 박상우(50) 씨가 4년 만에 내놓은 중단편 소설집이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1991년)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2000년), 작가가 “사람의 마을”이라 칭했던 ‘사랑보다 낯선’(2004년)에 이어 네 번째이자 마지막 ‘마을 시리즈’. 박 씨는 작가의 말에서 “이를 끝으로 외부 세계 탐사는 막을 내리고 ‘나’에 의해 형상화된 내면의 마을을 찾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소설집에 실린 7편의 글들은 다른 내용임에도 묘하게 닮아 있다.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의 대결”(강유정 문학평론가)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표제작 ‘인형의 마을’에서는 아예 이런 양립이 인생의 기로이기도 하다. 남이 장군이 지은 ‘북정가’에서 미평국(未平國)과 미득국(未得國)의 표현, 프랑스 왕비 앙투아네트의 왕비와 창녀 이미지, 매국노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 의사의 칼과 총의 선택. 무언가를 얻으면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삶. 경계에서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건 가치 없다. 이율배반 자체가 인생이니까.
물론 이러한 부조리가 냉소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면 아무렇게 살아도 되지 않나. 하지만 이 ‘아무렇게’에는 책임이 따른다. 답이 없다고 질문도 없는 건 아니니까. ‘인형의 마을’은 그 질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작가의 출사표이다. 누구나 짊어진 질문에 대답할 몫은 이제 각자에게 넘겨졌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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