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감독은 테니스의 예를 들었다. 처음 테니스를 배우는 사람이 코트에 나가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금만 세게 치면 나가버리고, 조금만 힘이 모자라면 네트에 걸려버리고 만다.
“그런데 테니스 선수는 코트에서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는 거거든. 자기 자유를 만끽하는 거지. 자신의 자유와 청춘을 만끽한다는 것.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말이죠. 연주도 그런 거예요. 연주가는 본질적으로 육체로 하는 것이기에 그 맛이 기가 막힌 거예요. 매일 해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곧 즐거움이지. 예술은 그런 점에서 스포츠하고 똑같습니다. 스포츠도 잘 하게 되면, 그게 예술 아닙니까.”
황 병기 감독은 우리나라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이자 국악 작곡가이다.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거친 전형적인 ‘KS 엘리트’인 그는 6.25 전쟁 중 피난처인 부산에서 우연히 들은 가야금 소리에 매료돼 평생의 인연을 맺었다. 이런 그의 이력은 어려서 스승의 내제자로 들어가 혹독하고 뼈를 깎는 수련을 쌓은 후에야 비로소 명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그래서 무학이 많았던 국내 국악계에서 확실히 ‘튀는’ 것이다.
- 1974년에 작곡하신 ‘침향무’가 대표작이시죠. 침향무에 대해 스스로 ‘내 음악의 전환점’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한국의 전통음악이란 것이 결국은 조선조의 음악입니다. 그것도 조선 말에 당대 음악가들한테 물려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형체가 없잖아요. 그 이전은 음원은 물론이고 악보도 남아있는 게 없죠.”
당시 황 감독의 고민은 ‘과연 어떻게 해야 조선조의 틀을 깰 수 있을 것인가’였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거꾸로 올라가 보자’는 것. 이왕이면 화끈하게 고려를 넘어 신라로 들어가 보자는 것이었다.
“더 옛날로 들어가는 것이 전통의 틀을 깨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이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에요. 서양 작곡가들도 했던 방법입니다. 낭만주의의 틀을 깨기 위해 고전파로 들어가고, 고전을 깨기 위해 바로크로 올라가는 거죠. 내가 만약 신라사람들한테 무용곡을 위촉받았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내가 신라인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곡이 침향무입니다.”
침향무와 함께 황병기의 대표작으로 ‘미궁’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침향무가 그윽하고 단아한 신라의 향기를 품었다면, 미궁은 초현대적인 전위물에 가깝다. 당연히 청자들의 반응도 양극으로 갈려 있다. 사실 화제성으로만 놓고 보면 미궁이 침향무를 압도한다.
황 감독은 지난 5일부터 다음달 17일까지 릴레이 창작곡 발표회를 열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본인의 말로 ‘나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연주한다. 그러나 미궁만큼은 스스로 가야금을 탈 계획이다.
미궁은 세상에서 오직 황병기만이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궁은 가야금과 구음으로 이루어진 곡으로 황 감독이 극단의 모더니즘을 시도한 실험적인 작품. 국악뿐만 아니라 국내 음악 전 장르에 걸쳐 최대의 화제작이자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가야금은 전통적 연주법에서 벗어나 있고 구음자는 시종 웃고, 울고, 비명을 지르고, 신음을 낸다. 1975년 명동 국립극장 초연 때에는 한 여성관객이 듣다가 무섭다고 소리치며 관객석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미궁은 난해한 곡이 아닙니다. 음악이란 게 ‘이래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들으니까 난해한 거죠. 일종의 성악곡인데 성악이라면 누구든지 이쁜 소리를 생각하지요. 미궁에서는 ‘인성(人聲)’을 쓴 겁니다. 인성이 뭡니까? 사람목소리. 사람목소리를 들어보면 웃는 소리, 우는 소리, 신음, 신문 낭독하는 소리 … 뭐 이런 것들이죠. 곱게 다듬어진 소리로 음계를 갖고 부르지 않고 그냥 웃고 울고 하니까, 이게 어렵다는 거예요.”
미궁에는 ‘귀신을 부르는 주문’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어있다. 초연 후 까맣게 잊혀져 있다가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다시 ‘떴다’. 온갖 루머가 나돌았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궁을 세 번 들으면 죽는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3000명이 죽었다’라는 것이다.
“별 얘기가 다 있죠. 미궁의 작곡가가 자살했다는 말도 있고, 한국 사람이 아니라 미국사람이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죠. 심지어 가장 걸작은 CD를 사 왔는데, 틀지도 않았는데 소리가 나더라는 말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군대에 갔더니 밤에 담력훈련 시킨다고 틀어줬다더군요. 하하하!”
1965년 미국에서 황병기의 독집음반이 출시됐다. 양악, 국악을 통틀어 국내 음악인 중에서는 최초의 독집이었다. 미국 음악계에서는 이 음반에 대해 ‘하이 스피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정신적 해독제’라며 경의를 표했다. 지금까지도 황 감독이 아끼는 평이다.
“제 음악이 사람들의 정신을 해독시켜줄 수 있다면 기쁘죠. 그 정도 되면 제 일생을 한 번 걸어볼 만 하지 않겠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음악을 오락으로, 장난삼아서 하는 겁니다. 음악 들으면서 어깨나 움칫거리고, 저는 그런 음악 안 합니다. 그런 음악에다가 하나뿐인 인생을 걸 수는 없지요.”
황 감독은 침향무와 미궁을 포함해 자신의 모든 음악의 근저에 깔린 것은 ‘슬픔’이라고 했다. 미궁도 알고 보면 처절한 음악이다. 그는 음악, 아니 예술의 본질이 슬픔에 있다고 본다. 실제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비단길’의 경우 ‘너무 슬퍼서 타지 못 하겠다’는 연주자도 있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사람들을 보면 웁니다. 눈물부터 쏟아지지요. 왜냐? 슬퍼서 우는 거지요. 그러나 그게 최고의 기쁨이거든. 눈물을 쏟을 정도의 기쁨이라야 그게 진정한 기쁨이지. 슬픔을 뱃속에서 머금고 나오는 기쁨이라야 진짜인 겁니다.”
- 서양음악과 우리 국악은 많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감상법도 달라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서양음악이 만년필 글씨라면 우리 음악은 붓글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만년필로 쓴 ‘한일(一)자’와 붓으로 쓴 것은 다르지요. 만년필로 쓰면 직선이겠지만 추사가 쓴 한일자를 보면 직선이 아니거든. 선 하나가 하나의 완결성을 가져요. 생명력을 갖지요. 성악도 그렇고 가야금도 그렇고 국악에서는 소리가 붓글씨처럼 나옵니다. 이건 말로 표현하기가 아주 어려운데 …”
황감독은 직접 “동차아∼아앙 ∼이∼이∼이∼이∼” 하며 시조 첫 머리를 불러보였다.
“이건 피아노로 칠 수가 없어요. 막 꿈틀대지 않습니까? 소리 자체만 듣고서도 그 안에서 오묘한 어떤 세계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지요.”
- 국악 외에 좋아하시는 음악이 있나요?
“서양 현대음악 중에서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죠. 제게 서양현대예술에 대해 깨우쳐준 음악입니다. 재즈도 좋아해요. 존 콜트레인의 ‘selflessness·無我’라는 음반은 음악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음악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음악을 사랑하기에 앞서 ‘침묵’을 사랑합니다. 조용한 것을 제일 좋아하죠.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일을 못 해요. 음악이 나오면 다 집어치우고 음악만 들어야 합니다. 저는 집을 고를 적에도 전망보다 조용한 것을 우선합니다. 우리 집에 와 보세요. 절간보다 조용합니다. 하하!”
장충동 국립극장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있은 지 며칠 뒤 사진촬영을 위해 ‘절간같이 고요한’ 황 감독의 북아현동 자택을 방문했다. 황 감독은 “5분 정도 가야금을 타드릴 터이니 그 사이에 사진을 찍으시라”면서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의 무릎 위에서 가야금은 읊조리고, 웃고, 울고, 노래했다. 들으면서 비로소 읊조리고, 웃고, 울고, 노래하는 듯했던 그의 독특한 말투와 어법의 연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야금은 황병기였고, 황병기는 가야금이었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만든다. 한국오동은 한국소리를 내고 중국과 일본의 오동은 중국, 일본의 소리를 낸다. 오동 중에서도 최고의 오동을 석상자고동(石上自故桐)이라 했다. 돌 틈에서 스스로 말라죽은 오동이라는 뜻이다. 오동 자체가 ‘번뇌’를 해야 한다. 그래야 ‘뭔가’가 서려있는 소리가 난다.
어느 틈에 가야금 소리는 멎어 있었다. 연주가 끝난 자리, 그곳에는 석상자고동의 가야금 두 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사진제공=국립국악관현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