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영친왕(英親王)’을 일본식 호칭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꽤 많다. 그래서인지 개중에는 ‘영친왕’이라고 하지 않고 꼭 ‘친’자를 빼버린 ‘영왕’이라는 식의 표현을 고집하는 이도 더러 있다. 일본에도 엄연히 친왕제도가 존재하고 있으니 분명 그렇게 생각할 만한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우리나라에도 마침내 친왕이라는 호칭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00년 8월의 일이다. (…)친왕 책봉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고 그 결과 황2자에게는 ‘의친왕’, 그리고 황3자에게는 ‘은(垠)’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영친왕’이라는 봉호가 주어졌다.”》
日帝음모에 관한 31가지 오해와 진실
경복궁과 서울시청, 북한산과 관련해 널리 퍼져 있는 얘기는 이렇다.
일제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터를 파헤쳐 조선총독부 청사를 일(日)자 모양으로 세웠고 그 앞으로 이어진 덕수궁 앞쪽에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을 본(本)자 형태로 만들었으며 이것이 대(大)자 형상인 북악산과 어우러져 ‘대일본(大日本)’을 나타낸다는 것. 민족정기를 압살하고 일제의 영구통치를 획책하기 위해 조선의 심장부에 그런 식으로 건물을 배치했다는 해석이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이후 잘못 알려진 서른한 가지의 역사적 오해와 오류에 대해 사료를 통해 무엇이 진실인지 밝힌다. ‘일제잔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그가 밝힌 ‘대일본’ 건물 배치의 진실은 이렇다.
우선 일제 식민통치자들이 설령 그런 저의를 갖고 있었더라도 공개적으로 확인된 기록은 ‘아직’ 없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경우 ‘일(日)’자 모양을 지녔다는 것이 줄곧 지적돼 왔지만 그렇더라도 ‘일본’의 ‘일’자를 의미하는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게다가 본(本)자 형태로 알려진 경성부청의 경우에도 그 시절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그런 모양으로 그 건물을 인식했다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오히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당시 경성부청의 설계자가 건물의 형상을 ‘궁(弓)자형’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1996년 말 정부가 국보 제1호인 남대문과 보물 제1호인 동대문의 공식명칭을 각각 ‘숭례문’과 ‘흥인지문’으로 바꾼 데 대해서도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일제가 문화재를 지정하며 왜곡했던 것을 바로잡은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예전 사람들이 ‘한성(漢城)’이라는 이름을 고집하지 않고 대개 ‘서울’이라고 불러왔듯이 남대문이나 동대문은 일제가 악의적으로 왜곡한 결과라기보다 오랜 세월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전해 내려왔다는 것이다.
반면에 원래 명칭이 ‘돈의문(敦義門)’인 서대문의 경우 ‘서대문’이라는 이름은 일본인들이 붙인 것이라고 밝힌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돈의문의 속칭을 ‘신문(新門)’으로 기록하고 있고 지금도 종로 방면에서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이름이 ‘새문안길’이라는 점을 들어 서대문이 아니라 ‘새문’이 옳다고 말한다.
저자는 “누군가 기초자료 몇 가지를 조금만 꼼꼼하게 살펴보더라도 금세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데도 이토록 부정확하거나 조금은 엉터리에 가까운 내용들이 아직까지도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한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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