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란… 침묵이자 詩”

  • 입력 2008년 9월 26일 03시 00분


24, 25일 전북 고창군 선운사에서 열린 시문학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시인들이 선운사 종진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정현종 씨, 종진 스님, 서정춘 김화영 송희 장석남 씨. 고창=박선희  기자
24, 25일 전북 고창군 선운사에서 열린 시문학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시인들이 선운사 종진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정현종 씨, 종진 스님, 서정춘 김화영 송희 장석남 씨. 고창=박선희 기자
한국대표 시인들과 선운사에서의 하룻밤

《올해 가을도 선운사(전북 고창군)엔 꽃무릇(석산)이 한창이다.

24일 미당 서정주 선생의 고향이자 문학적 터전인 고창의 선운사를 찾아가자 선홍빛 꽃들이 산사의 계절과 함께 무르익고 있었다. 미당의 ‘선운사 동구’,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를 비롯해 많은 작품 속 배경이 돼 왔던 이곳에서 ‘정현종 시인과 함께하는 템플스테이’가 24, 25일 열렸다. 정 시인 외에도 서정춘 문인수 나희덕 장석남 송희 시인과 문학평론가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가 경기 군포시에서 온 권용은 씨 모녀 등 10여 명의 문학 애호가와 함께했다. 》

○ 詩心과 어울린 가을밤 템플스테이

선운사 만세루에 앉자 대웅전 앞에 핀 목백일홍의 자태가 선연했다. 연꽃차, 야생차를 끓이며 시인들은 ‘시 쓰기와 무위(無爲)’란 주제로 자유로운 대담을 나눴다.

“무위란 것은 이 공간뿐 아니라 침묵과 여백의 언어예술인 시와도 잘 어울린다”고 화두를 던진 정 시인은 “일상에 찌들어 마음이 꽉 차 있으면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정치, 경제에 비해 현실적인 힘은 작지만 무위의 상태를 그리워하고 보여주는 것이 시 정신”이라고 말했다.

현대인의 삶에서 무위의 미덕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지적됐다. 김 교수는 “끊임없이 경쟁력만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여유 있게 천천히 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며 “말로만 느림을 말하고 내적으론 졸고 있는 시대에 시의 무위란 매순간 새롭게 깨닫고 태어나는 내적 긴장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나희덕 시인은 “무위를 모르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쫓기듯 사는 일상을 돌아보면 시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고창, 선운사와 인연이 깊은 미당의 문학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제였다. 김 교수는 “미당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사무치도록 고향 산천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며 “헐벗음에 대한 근원적 지향과 무위의 정신이 잘 드러났던 미당 시의 특색이 선운사에서도 엿보이는 듯하다”고 말했다. “미당과 동백꽃에 이끌려 박찬 시인과 여행을 다녀간 적이 있다”는 문인수 시인은 지난해 타계한 박찬 시인과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서정춘 시인이 “다들 미당 귀신한테 홀려 왔다”고 말하자 좌중에선 웃음이 터졌다.

저녁 예불 후 숙소인 능인각 다담(茶談)실에서 조촐한 차담이 열렸다. 언어의 의미, 작가의 창작 혼 등에 대한 소견이 자유롭게 오갔고 애송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도솔산 북쪽 기슭의 사찰에서 시심과 어울린 가을밤이 깊어갔다.

○ “새벽 법고-종소리에 오랜 잠에서 깬 듯”

둘째 날 오전 4시부터 새벽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경내에 울렸다. 사찰 체험의 프로그램에 따라 대웅전에서 108배 아침예불을 드린 일행은 일찍 도솔암으로 꽃무릇 포행을 나섰다.

가뿐한 차림으로 산행에 나선 장석남 시인은 “새벽에 울리는 법고와 종소리를 들으니 오랜 잠에서 깬 듯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정 시인도 “무위란 말처럼 목적 없이 쉬엄쉬엄 들렀다 간다. 경치 좋은 산중에서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란 말의 의미를 새롭게 되짚어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선운사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봄, 가을 두 차례 시인들을 초청한 시문학 템플스테이를 열기로 했다. 정현종 서정춘 시인 등 이번에 참여한 시인들은 10월 말 시와시학사에서 출간될 선운사 시선집에 이곳을 소재로 한 신작을 함께 실을 예정이다.

고창=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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