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초의 전자 IT 제품 디자인 전문 교육
사실 SADI PD학과는 생긴 지 4년이 채 안 된 ‘아기’ 학과다. 과가 개설된 건 2005년. ‘전자 정보기술(IT) 분야에 특화된 디자인 인재 양성’이 목표였다.
“‘디자인이 21세기 경쟁력’이라는 회장(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뜻에 따라 디자인 교육기관인 SADI가 설립된 게 1995년입니다. 그 뒤로 제일모직, 제일기획 등과 협력해 패션디자인(FD)학과와 커뮤니케이션디자인(CD)학과를 운영해 왔지요. 그런데 제가 2002년 학장으로 와 가만히 보니 어째서 PD학과가 없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삼성전자라는 좋은 기업을 왜 그냥 두고 있을까 싶더군요.”(원대연 SADI 학장)
SADI에 오기 전 제일모직 사장직을 지낸 원 학장 눈에 PD학과는 산학(産學) 협력을 통한 실무형 교육을 제공하기에 최적이었다.
그러나 숙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FD, CD학과는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 및 카네기멜런대 등 세계적 교육기관과 협력해 커리큘럼과 교육방식 등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PD학과는 달랐다.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었어요. 전자 IT 제품 전문, 그것도 기업이 운영하는 형태의 디자이너 양성 학교는 세계적으로도 첫 도전이었습니다.”
● 디자인, 그 이상의 디자이너를 키워라
SADI는 직접 커리큘럼 만들기에 나섰다.
삼성전자 등 기업들의 협조를 받아 실제 제품이 개발되고 생산, 판매되는 과정을 파악한 뒤 철저히 실무에 바탕을 둔 커리큘럼을 짰다. 교육과정에는 디자인뿐 아니라 경영학, 공학, 심리학, 인문학 등 실제 제품 디자인 때 이해가 필요한 관련 학문도 포함시켰다.
“‘그림만 잘 그리는’ 제품 디자이너는 성공할 수 없어요. 제품 소재, 엔지니어링, 시장 구조, 가격 정책 등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최고경영자(CEO)’형 디자이너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디자이너 스스로 자신의 디자인에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기업에 가든, 창업을 하든 성공할 수 있죠.”(박영춘 PD학과장)
SADI의 교육 행정을 맡고 있는 전재경 대리는 “이 때문에 PD학과는 이미 대학에서 다른 학문을 전공하고 온 학부 졸업자들도 많이 선발하는 편”이라고 했다. 실제 PD학과 학생들 가운데 고졸자나 기존에 미술을 전공한 사람은 소수다. 나머지는 역사학, 철학, 경제학, 생물학, 건축학, 기계공학, 컴퓨터공학 등 비(非)미술 분야 전공자들이다. 이들 중엔 삼성전자, SK텔레콤, 미래에셋 등 유명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온 사람들도 있고, 의사 출신까지 있다.
● 성공의 핵심은 ‘열정’
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엮는 공통점은 모두가 디자인의 꿈을 평생의 ‘로망’으로 품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SADI에 입학한 PD학과 3학년 박진수 씨는 “다들 1년에 330일은 학교에 나오는 것 같다”며 “과제, 공모전 준비 등으로 작업이나 팀 회의를 하다 보면 밤을 새우는 날도 많다”고 전했다. 실제 PD학과 학생들의 작업실 곳곳은 치약, 칫솔, 아령, 수건 등 ‘거주(居住)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주방에나 있어야 할 에스프레소 추출기까지 책상 위에 가져다 놓은 학생도 있었다.
“밤 12시면 ‘세콤(보안업체) 아저씨’들이 ‘집에 좀 가시라’고 달래요. 그래도 안 가지만(웃음). 간밤에도 6명 정도는 밤을 새운 것 같네요.”(PD학과 3학년 이민희 씨)
원 학장은 “다른 학과에 비해 PD학과 학생들이 나이는 좀 많지만 ‘디자인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목적의식이 굉장하다”며 “이것이 가장 큰 강점”이라고 말했다.
● 현장을 놀라게 할 디자인이 ‘진짜’ 디자인이다
SADI의 실무형 디자인 교육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스튜디오 교육과 병행되고 있는 기업 현장 교육이다.
SADI 학생들은 3년(재학 기간)간 방학 때마다 산학 프로젝트 및 기업 인턴십에 의무적으로 참가한다.
“이걸 안 하면 졸업이 안 돼요. 그래서 실제 방학은 여름, 겨울 합쳐 20일 정도예요. 기업에 가서 실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아이디어를 내는데, 현업에 계신 분들의 코치를 직접 받을 수 있어서 정말 큰 도움이 돼요.”(PD학과 3학년 이주석 씨)
한양대 미대를 중퇴하고 SADI에 입학한 이 씨는 “SADI에서 얻은 디자인 실무 경험은 대학 때의 것과 차원이 다르다”며 “(대학과 달리 SADI에서는 학위를 받을 수 없지만) 내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단언했다.
SADI는 전자 IT 관련 기업의 실무진을 교수진으로 영입해 교실에서도 현장형 교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머니처럼 자상한, 답을 알려주는’ 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게 원 학장의 설명.
“흔해 빠진 아이디어는 필요 없습니다. 기업들이 원하는 것은 ‘뭔가 새롭고 다른(something new & different)’ 디자인이니까요.”
● ‘나’를 지키며 협업할 수 있는 힘
이를 위해 SADI는 ‘크리틱(critique·비평)’이라고 불리는 토론식 수업을 채택하고 있었다.
특정 테마를 주제로 팀프로젝트 과제를 내준 뒤 이에 대한 20여 명(한 학년 정원) 학생의 각기 다른 아이디어를 토론식으로 발전시키는 수업이다. 이민희 씨는 “동기들 전공이 다 다르다 보니 서로 배우는 게 많다”며 “각기 다른 관점이 상충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면을 발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했다.
“3, 4명은 울고 나가야 수업이 제대로 됐다고 생각해요(웃음). 1, 2학년 때는 많이 힘들어하지만 3학년이 되면 자기들끼리 불꽃 튀는 크리틱을 진행하죠. 그럴 때가 가장 만족스러워요. ‘이 녀석들 하산할 때가 됐구나’ 싶어서.”(박 학과장)
박 학과장은 “팀 간 치열한 경쟁을 유도해 학생들이 혼자서는 넘을 수 없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통해 학생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주관을 갖고 남을 설득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며 “이는 치열한 기업 현장에서 실제 제품을 개발할 때 무엇보다 필요한 능력”이라고 덧붙였다.
SADI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디자인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는 이들에게 디자인의 다양한 분야와 독창적인 최신(SADI의 커리큘럼은 매 학기 10%가량 리뉴얼된다) 제품 디자인들을 끊임없이 소개해주며 숨은 창조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원 학장은 “지난해 1기 졸업생들은 삼성전자, 디자인 전문회사 등에 취업하기도 하고 벌써 자신들끼리 뭉쳐 디자인 회사 창업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며 “SADI는 미래 한국 디자인의 인재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