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헤럴드트리뷴∼!”
-배우 장근석
“매일 누군가가 내 모습을 찍었다면 숨이 막혔을거야.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할리우드가 아닌 서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탤런트 정려원》
○ “내 인생 내 멋에 취해 자유롭게 살련다”
“아, 어제 너무 달렸어. 하지만 에스프레소 한 잔과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하루를 준비하노라면 더는 어떤 것도 필요 없지….”
난 작년에야 내가 섹시하다는 걸 알았어.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더라고. 그래서 난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려고 봉지를 썼지.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나의 이름은 바로 ‘허세 봉지맨’.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를 패러디한 ‘허세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이라고. 이미 인터넷에서 화제의 손수제작물(UCC)로 떴지.
‘된장녀’ ‘신상녀’는 갔고 이제 허세의 시대가 온 거야. 청계천 길을 걷다가 마주친 분수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태양을 마주보고 두 손을 들어올려 이렇게 외치곤 하지, “세상의 중심은 나. 바로 나라고!”
그런데 요즘 내 후배들이 부쩍 늘었더군. 프랑스 파리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려하는가 하면 할리우드에서 태어났다면 숨이 막혔을 거라는 아이들이 나타났다고. 햐∼ 귀신같은 사람들. 그렇게 허세를 부리고 싶은 거야? 정신적인 사치를 누리고 싶은 거야? 진정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세계에 빠지고 싶은 거야? 훗, 그렇다면 나 봉지맨이 알려주지. 21세기 허세 부리기 강좌, 지금부터 시작이야!
○ 제1장…빼앗긴 들에도 허세는 오는가? 허세인의 24시
‘눈물 스펀지.’
환히 웃는 피에로. 하지만 그의 얼굴에 마우스를 대면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 밑으로 선명하게 얼룩져 흐르는 피 한 방울. 어둡고 우울한 이 감성공간은 그래픽 디자이너 허혜윤(26·여) 씨의 홈페이지. 올해 3월 제작한 이 홈피에 대해 그는 “스펀지로 눈물을 흡수하듯 메마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감성공간”이라고 한다. 우울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는 적당히 슬픈 음악에 연필 드로잉을 올리고 군데군데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스스로 슬픈 감성을 안고 살아간다”는 허 씨의 일과는 예상 밖으로 단순하다. 집 앞 서점에서 5시간 동안 책을 보곤 한다. 그가 우울한 영감을 떠올리기 위해 즐겨보는 책은 5∼6세 유아용 동화책이다. “밝은 것을 보면 외로워진다”는 이유에서다. 오후 10시면 양재천에 나가 2시간 동안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외로움을 찾는다.
그런 그는 최근 영화 ‘맨 프롬 어스’를 본 뒤 우울해졌다. 믿었던 종교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이처럼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플 땐 자신의 미니홈피를 닫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쓴 ‘그리움에 대하여’ ‘치유의 첫 단계’ ‘마침표의 무게’ 등 심오한 글을 읽으며 그를 ‘공간과 시간의 간극을 읽어주는 지도자’ ‘빨간 물음표‘ ‘외계 생명체’라고 부른다.
하지만 허 씨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이런 삶을 ‘함정’이라고 표현했다. “우울한 콘셉트 때문에 때론 밝게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요. 자신의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스스로 속는 것 아닐까요.”
그의 우울함에 대해 “허세다” “멋 부린다” 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함을 버리지 않는 이유를 “‘마이너’로 살고 있다는 우월감 때문”이라고 했다.
스스로 ‘이모 키드(Emo-Kid)’라고 소개한 대학생 김정현(22) 씨는 자신의 삶을 ‘허세’라 부른다. ‘이모’는 ‘이모셔널(emotional)’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진로, 가치관, 패션 등 모든 삶을 감정적으로 사는 신세대를 일컫는 말. 이모 키드의 아이콘인 여성 로커 에이브릴 라빈을 좋아하는 김 씨는 그의 패션, 신경질적인 행동을 모두 따라하며 자칭 ‘남자 에이브릴 라빈’으로 행세한다.
“아무 일 없어도 친구에게 화를 내고 고독한 척한다”는 그는 “과거 기성세대에겐 삶의 목표가 돈이나 명예였다면 지금 세대에겐 설령 그것이 허세라 하더라도 멋과 자유”라고 말했다.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
인생 사랑 등 내면의 허세 즐겨… 이미지는 터프가이 → 감성 아이돌
○ 제2장…아, ‘허세 근석’이 뜰 줄이야
무언가 있어 보이는 글귀, 나와는 다른 감성을 가진 듯한 영혼, 화보 같은 사진 한 장….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진지한 이 감성을 사람들은 ‘허세’라 부르기 시작했다.
허세의 사전적 의미는 ‘실속 없이 겉으로만 드러나 보이는 기세’. 하지만 단순히 허풍만은 아니다. 된장녀, 신상녀 트렌드가 경제력에 어울리지 않게 무리하게 명품을 구입하는 외향적 사치를 뜻한다면 허세는 ‘정신적 사치’에 해당한다.
허세가 이슈로 떠오른 건 바로 ‘허세 근석’ ‘장 허세’라 불리는 배우 장근석부터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미니홈피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배경으로 한 흑백 사진과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명대사를 패러디한 글을 실었다. ‘다시 한 번 파리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한 손에는 와인병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샹젤리제 거리에서 이렇게 외칠 테다. 뉴욕 헤럴드트리뷴!’
그의 ‘허세스러운’ 글과 사진들은 곧 화제가 됐다. ‘손가락이 부르트고 감각마저 무뎌져 버렸다. 내 어깨에 걸려 있는 기타를 부숴버리고 싶다’는 그의 대사는 다른 이들에 의해 ‘이가 시리고 날카로움마저 무뎌져 버렸다. 날 약 올리는 골프공을 작살내고 싶다.’(강아지 ‘허세 똘똘’ 버전), ‘내 손에 들려있는 피자를 먹어버리고 싶다’(피자 버전) 등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탤런트 정려원도 마찬가지. ‘매일 누군가가 내 모습을 찍었다면 숨이 막혔을 거야.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할리우드가 아닌 서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정말 알코올이라는 것은 탈출구를 찾지 못해 내 안에서만 꿈틀대며 떠돌던 그 무엇을 내 몸 밖으로 토해낼 수 있게끔 확 끌어 잡아당겨버리는 그런 갈고리 같은… 마법의 힘이 있는 걸까’ 등의 글을 미니홈피에 남겼다가 현란한 미사여구 때문에 ‘허세 퀸’으로 통한다.
연예인들의 과도한 진지함이 있기 전 허세는 대중문화 속에서 경쾌하게 비쳤다. KBS2 ‘개그콘서트’의 ‘달인’ 코너는 코믹 허세의 대표작이다. “해봤어요?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라는 달인(김병만)의 유행어는 자신의 허세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 후 망가지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경영에서도 허세는 중요하다. 일본 경제평론가인 니시무라 아키라(西村昇)는 저서 ‘CEO의 다이어리엔 뭔가 비밀이 있다’에서 성공적인 최고경영자(CEO)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허세 부리기를 꼽았다. 저자는 “일의 목표를 3배 이상 높게 잡는 등 일부러 허세를 부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 제3장…이 시대 허세인으로 사는 법
광고회사 제일기획은 24일 ‘디지털 호모나랜스(Homonarrans·이야기 하는사람)’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허세가 주제다.
15세 이상 44세 이하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4.8%가 ‘내 취향, 관심사를 표현하는 것이 나에게 중요하다’라고 답했다. 또 53.5%가 ‘인터넷에서 나를 표현하는 것이 나의 인간관계에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 조사를 진행한 브랜드마케팅연구소 홍지영 박사는 “내 일상을 파는 것이 하나의 놀이가 됐고 잘난 척 하는 것을 즐기는 시대가 됐다”며 “자기표현을 하는 데 사회적 압박감을 느끼는 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허세인’의 이미지도 변했다. 가죽 재킷에 청바지, 말굽구두 등 이덕화, 최민수, 김보성 같은 터프가이, 신성우 류의 로커 이미지가 아날로그 시대 대표 허세 스타일이었다면 지금은 곱상한 외모에 명품 브랜드 의상을 갖춰 입은 귀공자 타입이다. 탤런트 정일우, 장근석, ‘빅뱅’의 지드래곤 등을 아이콘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과거 반항아처럼 무조건적인 터프함을 과시하지 않는다. 디지털렌즈교환식(DSRL) 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찍거나 스타벅스 같은 커피 전문점에 앉아 낙엽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등 내면적인 허세를 즐긴다. 또 적어도 한 분야는 마니아 뺨치는 전문지식을 갖고 있으며 블로그, 미니홈피 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돌체 앤드 가바나’ 청바지, ‘구찌’ ‘디올옴므’의 스키니진을 즐겨 입는 이들은 음악 역시 일렉트로닉 계열이나 라운지 음악, J팝(일본 대중음악)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에 심취해 있다. ‘체 게바라 평전’을 감명 깊게 봤다는 허세인도 많다. 수염이 덥수룩한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심지어 자신의 오토바이에 체 게바라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허세인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는 단연 인생과 삶이다. ‘싸이월드’의 글 모음 코너인 ‘광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카테고리 중 하나는 바로 ‘감성’이다. 인생, 사랑, 이별 등 철학적이고 감성적인 글이 많다. 하루 평균 2500건이나 오를 정도다.
이들이 주로 쓰는 허세 ‘수법’은 자신의 인생 경험을 살려 추상적인 주제에 대한 정의 내리기. ‘삶이란…내가 넘지 못하는 장벽’, ‘슬픔은 나를 짓밟는 가시’ 같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연예인들의 셀프 카메라처럼 ‘첫사랑? 그건 중3 때 처음 다가온 기쁨’, ‘나는 시계추처럼 무거운 남자’ 등과 같은 글을 올리거나 100문 100답 허세글도 많다.
허세인들은 허세 부리는 데 가장 필요한 것으로 인맥을 꼽는다. MSN 메신저 친구가 3000명이나 있다는 디지털 인맥왕 양준철(23·프로그래머) 씨는 “메신저 대화명을 ‘나 아프다’ 식으로 아예 내 감정을 드러내거나, 로그온-오프를 반복적으로 해 나를 알린다”고 말했다.
나와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인맥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허세의 대상이 됐다. 최근에는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려는 허세인들 덕에 결혼식 하객 대행 아르바이트가 성행하고 있다.
‘하객도우미 114’의 김경태 실장은 “적게는 5명, 많게는 50명 이상 하객 대행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한다”고 말했다. 사진만 찍어주는 하객, 뒤에만 서있는 하객 등 역할도 나뉘었고 나이, 키, 몸무게 등 신체조건까지 원하는 대로 골라주는 ‘맞춤형’ 대행도 나타나고 있다.
하객 대행을 찾는 커플이 늘다 보니 관련 업체들도 우후죽순 생겨나 1인당 비용이 5만 원에서 최근에는 3만∼3만5000원 선으로 내려갔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지면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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