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드레스가 어울린다고? “연기밖에 몰라요”▼
김혜수에게는 1980년대 만들어진 복고 이미지가 있다. 하얀 태권도복. 머리 위로 쭉 뻗어 올린 앞차기. 하지만 어린이잡지 사진 속 깜찍한 소녀는 가까이하기 쉽지 않은 카리스마의 섹시 퀸으로 성장했다.
“내가 무섭나? 모르는 사람이 친한 척 접근하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무서운 사람 아닌데. 잔잔한 멜로 시나리오가 그래서 잘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내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아 보이나…”라며 물끄러미 기자를 쳐다봤다.
‘모던보이’는 경쾌한 느낌의 동명 원작 소설을 독립운동 비밀결사요원 조난실(김혜수)과 한량 이해명(박해일)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로 바꾼 영화다. 원작에 비해 이야기와 캐릭터의 매력이 줄었다는 비판도 있다.
김혜수는 화난 듯한 눈으로, 입으로만 웃으며 “그렇다면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어떤 기사에서 ‘김혜수가 모던보이 망쳤다’더라. 나만 너무 튄단다. 그냥 ‘내가 싫은가 봐’ 하고 말았지만 요즘 ‘정말 이것밖에 안 되나’ 느낄 때도 있다. 진심을 가지고 연기했는데 안 되는 건가,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런다.(한숨)”
어느 순간 그는 연기보다 영화제 진행자석의 과감한 드레스에 관심이 쏠리는 배우가 됐다. 그는 “지나치게 화려하게 포장된, 쓸데없이 폼 나는 이미지가 불편하다”고 했다.
“그놈의 드레스.(한숨) 누가 ‘집에서 잘 때도 드레스 입느냐’고 하더라. 그런 가십은 짊어져야 할 몫이다. 어떻게든 배우로서 제자리를 맴돌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거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계속 한탄하면서.”
김혜수는 몇 년 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찾았다가 ‘배우’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바에 동석한 현지 배우가 직업을 물었을 때 ‘학생’이라고 답한 것.
“거리에서, 무대에서 온몸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그들을 보면서 감히 배우라는 말이 안 나왔다. 배우 김혜수는, 이제까지의 이미지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한숨)”
하지만 모던보이의 김혜수는 영화제 진행자석에서보다 밝게 빛난다. 늘어지는 이야기에 활력을 주는 춤과 노래의 중심에 그가 있다. 난실과 해명의 로맨스에 진정성을 더하는 열쇠도 그가 쥐었다. 영화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는 제몫을 했다.
“연말에 또 드레스 사진이 인터넷에 뜨겠지. 그래도 난 그냥 연기를 계속할 거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이.(웃음)”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영락없는 리드보컬이라고? “내식대로 질렀죠”▼
신나게 놀고 있는 ‘데블스’의 공연장에 경찰들이 곤봉과 최루탄을 앞세워 진입한다. 퇴폐적인 고고춤을 추는 공연을 중단하기 위한 것. 그래도 밴드와 관객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미친 듯 몸을 흔들어댄다. 영화 ‘고고 70’의 하이라이트다.
이 장면에서 데블스의 리드보컬 상규(조승우)와 현실의 조승우가 겹쳐진다. 뮤지컬에서 관객들을 쥐락펴락하며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리는 그 모습 그대로다.
인터뷰 중 그는 영화 속 리드보컬 상규처럼 열정적으로 그 느낌을 털어놨다.
“열반이랄까. 무대를 보니 사람들이 무아지경에 빠져 있고, 밴드 멤버의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튀고 있었다.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가 공중에 ‘부웅’ 하고 띄워준 것 같았다.”
영화는 1970년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활동을 금지당한 밴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 작품은 춤과 노래가 70%에 가까울 정도로 음악에 집중했고 이은하의 ‘밤차’, 티나 터너의 ‘프라우드 메리’ 등 익숙한 노래들이 정겹다.
아쉬운 점은 촌스러운 옷차림과 장발, 고고춤 등 복고풍 설정이 작품 속에서 유기적으로 살아나기보다는 그냥 배경화면에 그친다는 것. 시대의 ‘맛’을 제대로 살렸으면 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다르다.
“당시의 경직된 시대상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음악과 우정만 바라보는 젊음의 순수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70년대나 지금이나 젊음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쿨하다’는 것.”
그는 뮤지컬계의 티켓 파워 1위로 꼽히지만 정작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역할은 쉽지 않았다고 했다.
“뮤지컬에서는 노래도 연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따로 노래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감정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노래해야 하는 뮤지컬 시상식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결론을 내렸다. 내 방식대로 그냥 ‘맛깔나게’ 부르면 되는 게 아닐까.(웃음)”
영화와 뮤지컬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쿨 가이’의 바람은 소박했다.
“3개월간 홍익대 앞에서 영화 속 밴드 멤버들과 연주하고 술 먹고 밥 먹고 실제 공연도 하고 살았다. 그런데 모자도 안 쓰고 ‘난닝구’ 입고, ‘쓰레빠’ 신고 다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라. 이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젊은 사람이 많은 럭셔리한 노래방 말고, 조용한 상수동 쪽에서….(웃음)”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