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으로 쓰려던 그랜지, 최고 와인으로

  • 입력 2008년 10월 2일 08시 12분


지난줄거리 - 와인을 잘 몰라 스트레스를 받던 정유진은 소믈리에로 일하는 고교 동창 김은정에게 연락해 매주 한 차례 과외를 받기로 한다. 정유진은 돔 페리뇽 수사가 코르크 마개를 발명해 지금처럼 샴페인을 마시고, 백년전쟁의 뒷 배경에는 와인이 있고, 샤블리는 토양이 중생대 바다여서 굴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차례로 배운다.

정유진을 따라 와인을 마신 지도 6개월이 지났다. 지난 두 달간 정유진의 급작스런 해외 출장으로 혼자 자습을 해야 했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혼자서 홀짝이는 와인도 제법 맛있었고, 이따금씩 초보자를 만나면 배운 지식을 아낌없이 쓰며 젠 체 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며칠 전 정유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굉장한 경험을 들려줄 테니 항상 만나는 와인바에서 보잔다. 약속 당일, 일찌감치 나갔지만 정유진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다.

“언제 온 거야? 깜짝 놀랐잖아.”

“서울이 그리워서 후다닥 왔지. 일이 길어져서 생각보다 오래 있긴 했지만 말이야. 나 없는 동안 설마 와인을 멀리한 건 아니지. 그렇잖아도 근사한 경험을 얘기하려고 불렀어. 너 ‘그랜지’(Grange)라고 들어봤지?”

“호주 최고의 레드 와인 아냐. 1995년인가 와인스펙테이터에서 프랑스와 미국이 아닌 나라로는 처음으로 ‘올해의 와인’으로 뽑혔잖아.”

“오∼ 제법인데. 맞아. 며칠 전 운 좋게도 ‘펜폴즈 와인 시음회’에 초대받았는데 그랜지 2003 빈티지와 ‘화이트 그랜지’로 불리는 ‘야타나 샤르도네’ 2005 빈티지를 마시게 됐지 뭐야. 야타나는 화이트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디감이 좋고, 산도가 훌륭했고, 그랜지는 뭐랄까. 다크 초콜릿 향에 실려 입 안에서 느껴지는 파워가 굉장했어. 환상적인 시간이었지.”

“쳇, 그런데 혼자만 가고. 담엔 나에게도 기회를 좀 달라고. 그랜지는 한 병에 100만원도 넘는다고 하던데.”

“수입상에게 살짝 물으니까 120만원 정도 한다고 하더라고. 그건 그렇고 펜폴즈 와인과 그랜지가 원래 왜 생겼는지 들어봤어?”

“특이한 사연이라도 있는 거야?”

“펜폴즈는 1844년 영국에서 호주 애들레이드로 이사 온 영국인 의사 크리스토퍼 로슨 펜폴드가 프랑스 남부에서 가져 온 묘목을 심고 환자를 위한 약용 와인을 만들면서 시작된 거야. 이후 점차 포도원이 확장됐고, 와인 메이커 맥스 슈버트가 프랑스 론 지방의 고급 와인을 생각하면서 1951년 그랜지를 만들었는데 바람대로 호주를 상징하는 와인이 됐지. 팬폴드 부부가 당시 살았던 집 이름을 따서 그랜지라는 이름을 붙였고 말야.”

상당히 흥미롭다. 약으로 쓰려던 와인이 세계 최고의 레드 와인이 되었다니 말이다.

“그랜지가 호주를 상징하는 아이콘 와인이 된 데는 ‘멀티 리저널 블렌딩’도 한몫 했어.이게 뭐냐 하면 바로사 밸리, 쿠나와라, 멕라렌 베일 등 여러 지역의 포도원에서 기른 포도를 블렝딩 해 와인을 만든 거야”

이길상 기자 juna109@donga.com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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