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삶은 무엇인가’ 그 처절한 탐색

  • 입력 2008년 10월 18일 03시 00분


요한 페터 크라프트의 작품인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소포클레스가 남긴 비극 9편 중에도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가 있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숲
요한 페터 크라프트의 작품인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소포클레스가 남긴 비극 9편 중에도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가 있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숲
◇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480쪽·2만6000원/576쪽·2만8000원·도서출판 숲

단국대 천병희 교수 국내 첫 원전 번역

“인간의 본질 꿰뚫은 모든 창작의 원형

문명의 뿌리 훼손않으려 원전 매달려”

영영사전을 보면 ‘오디세이(Odyssey)’의 뜻은 이렇게 풀이된다.

“많은 일이 벌어지는, 길고 흥미로운 여행(a long exciting journey on which a lot of things happen).”

또한 이 단어는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경 지은 고대 그리스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트로이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겪은 10년에 걸친 모험담. 그 길고 긴 여행에 매료돼 오디세우스보다 4배쯤 많은 시간 동안 한 길을 걸어온 학자가 있다.

천병희(69·사진) 단국대 명예교수는 고대 그리스 라틴 문학 번역에서 국내 최고로 손꼽힌다. 1970년대 초반부터 그가 한국어로 옮긴 40여 종의 책은 대부분 ‘국내 첫 원전 번역’이란 수식어를 달았다. 호메로스 키케로 세네카 플루타르코스 아우렐리우스 등 고대 문학의 정수라 할 만한 작가들의 작품이다.

“대학(서울대 독어독문학과) 2학년 때 장익봉 교수가 한 플라톤의 ‘향연’ 강독을 들은 것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됐소. 국가나 인생 등을 진지하면서도 격의 없이 논의하는 장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디다. 소포클레스 호메로스의 원전에 빠진 것도 그때부터였지. 방학 때도 고향에 안 가고 도서관에 처박혀 원전과 씨름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창조자’ 아이스퀼로스와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의 비극 역시 전집이 원전으로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그리스 비극은 모두 33편. 그 가운데 두 사람의 비극은 각각 7편이다. 나머지 19편은 모두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이들을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이라 부른다.

이번 책들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전형(典型)”이라 격찬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아이스퀼로스가 쓴 90여 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비극 3부작인 ‘오레스테이아’ 등도 실렸다.

천 교수는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도 번역이 거의 마무리 단계로 내년 초에 출간할 예정”이라면서 “인간의 심층을 꿰뚫어 현대 모든 창작의 원형이 되는 그리스 3대 비극을 모두 소개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천 교수가 생각하는 그리스 비극의 매력은 ‘삶에 대한 처절한 탐색’이다. 2000년이 넘게 시간이 흘렀지만 깊이는 여전히 웅혼하다. 셰익스피어나 유진 오닐, 지크문트 프로이트 등도 모두 그 영향 아래 있다. 하지만 천 교수는 이런 고전들이 ‘어렵고 난해하다’는 의견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지레짐작에 불과하오. 고대 그리스 문학은 재밌습니다. 정말 흥미로워요. 한번 잡으면 놓질 못하지. 게다가 읽는 이의 사고 지평을 넓히고 마음을 순화시켜 줍니다. 무엇보다 당시의 문화는 현대 사회의 출발이자 뿌리가 아니겠소. 솔직하되 거드름 피우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은 읽을수록 감탄하게 됩니다.”

영어나 일본어 번역판을 뿌리치고 원전에 매진하는 것도 이 뿌리를 훼손치 않으려는 뜻이다. 천 교수는 “원전 번역은 음식으로 치면 생생한 재료 맛을 최대한 유지해 요리사의 작품을 전달하는 일”이라며 “이미 완성된 요리에 이리저리 중역이란 조미료를 친다면 그게 무슨 맛이 나겠느냐”고 말했다.

천 교수의 오디세이는 계속된다. 요즘도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자택에서 번역에 매달린다. 지인과의 약속 역시 언제나 ‘6시 이후’다. 건강도 문제없다. 고민이라면 ‘10대 학생도 편안히 읽을 수 있게, 얼마나 더 충실하게 원작의 향취를 전달하느냐’뿐이다.

“요즘은 총 9권 분량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번역 중이오. 8권까지 마쳤으니 내년 상반기면 책으로 내놓을 겁니다. 비극을 마무리했으니 아리스토파네스 등 그리스 희극에도 도전할 생각입니다. 언제 쉬냐고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여행 중인데 휴식이 따로 필요 있겠소. 세상이 날 학자로 살게 해줬으니 힘 있는 날까지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가렵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기원전 455?)가 가장 앞선다. 배우를 두 명으로 늘리고 대화로 극을 이끄는 방식을 마련해 ‘비극의 창조자’라 불렸다. 소포클레스(기원전 497?∼기원전 405?)는 기원전 468년 20대 후반에 그리스 비극대회에서 당대의 거장 아이스퀼로스를 꺾고 우승하며 혜성같이 등장했다. 그의 드라마는 배우를 세 명으로 늘리고 복선과 긴박감을 부여해 ‘비극의 완성자’라 불렸다.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기원전 406?)는 인간의 정념을 주제로 한 극단적인 사실성과 아이러니한 표현이 특기로 두 사람이 이룩한 전통적 비극과는 결을 달리했다. 당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여성심리 묘사에 탁월한 그의 비극은 사후에 걸작으로 재평가받았다. 대표작으로는 현재 유일하게 온전히 전해지는 사티로스극(형식과 운율은 비극이지만 정신은 희극에 가까운 연극) ‘키클로프스’를 비롯해 ‘트로이의 여인’ ‘발광한 헤라클레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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