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Legend)’는 ‘전설’을 뜻한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혼다자동차의 세단으로 다가온다. ‘시빅’과 ‘어코드’로 이어지는 혼다 세단 라인업의 최상위 모델이다. 레전드는 독특했다. 독일차 아우디처럼 사륜구동 세단이다. 앞뒤좌우의 네 바퀴가 제각각 따로 구동(SH-AWD 시스템)된다. 그런 시스템은 커브와 가속주행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원심력에 의해 밖으로 밀리고야 말 급커브. 그런데도 꿋꿋하게 차로를 지키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여행지마다 그 지형에 딱 들어맞는 차가 있다. 미국 서부라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제격. 시속 200km 이하면 거북이 취급당하는 이탈리아 남부의 아우토스트라다(이탈리아의 고속도로)라면 고성능 세단이 최고다. 한국은 어떨까. 레전드 같은 사륜구동 세단이 딱이다. 구절양장의 하고많은 꼬부랑 산악도로 때문이다.
○ 섬과 바다의 환상적인 조화, ‘황제의 길’ 드라이브
고갯길을 날렵하게 주파할 이 ‘징한’ 세단.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거제 섬이다. 거기서도 ‘황제의 길’이라는 경관도로다. 섬 동편의 구조라해수욕장과 윤돌섬, 외도가 깃든 바다가 조망되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이다. 통영과 거제를 잇는 신거제대교. 다리 건너 만나는 도심(신현읍)에서 1018번 지방도로로 갈아타면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지난다. 그리고 구천저수지가 있는 산길로 접어든다. 이 꼬불거리는 고갯길. 레전드의 코너웍을 실험하기에 손색이 없다.
황제의 길은 저수지 댐 아래 구천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진입하는 고갯길에 있다. 동쪽의 한려해상국립공원 바다에 면한 장승포만을 잇는 길이다. 이름하여 망치(望峙)고개다. 고갯마루를 지나자 산길 오른쪽으로 푸른 바다가 나타난다. 여기가 황제의 길이다. 좀 더 내려가면 고개중턱에서 예쁜 펜션으로 이뤄진 자그만 마을을 지난다.
○ ‘황제가 가지 않은’ 전설의 길 망치고개
길 가던 동네 주민에게 물었다. 이 길이 황제의 길이 맞느냐고. 그런데 금시초문이란다. 아니 일운면이 이름까지 붙이고 꽃길조성사업까지 벌인 사실이 인터넷에도 떠다니는데도 모르냐고 다시 물었다. 대답은 같았다. 면사무소의 반응도 같다. 신규직원인 자신들도 잘 모른단다. 거꾸로 내게 묻는다. 어디서 들었느냐고.
3년 전이다. 나를 안내한 시청공무원이 이곳에서 분명히 알려줬다. 에티오피아 황제가 1968년 이 길을 지나다가 섬과 바다가 이룬 이 풍경을 보고 ‘원더풀’을 외쳤다고. 그래서 황제의 길이라고 불린다고. 인터넷에서 그런 내용을 담은 글 여러 편도 확인했다. 그 글의 작가는 “한국관광공사가 건넨 자료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수소문 끝에 1968년 당시 거제군청 직원과 전화통화를 하게 됐다. 1998년 퇴직 후 4800쪽의 거제시지(市誌) 편찬(1998∼2000년)을 맡았던 향토사학자 이성철(69) 씨다. “택(턱)도 아닌 얘깁니다. 황제라면 국빈인데 당시 군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사진촬영을 했던 제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설사 몰랐다 해도 당시 거제는 황제가 올 곳이 못 되었습니다. 중앙(서울)의 공무원도 출장을 꺼릴 만큼 오지였으니까요. 읍내에 얄궂은 여인숙이 달랑 하나 있었는데 우째(어째서) 황제가 거기서 잠을 잤겠습니까.”
외교통상부에도 문의했다. 방한 사실은 확인했지만 거제 방문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이는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 에티오피아는 6·25전쟁에 6000여 명의 전투부대를 파병한 참전16개국 중 하나다. 한국은 1968년 강원 춘천시 의암 호반에 에티오피아군 참전 기념비를 세웠고 황제는 제막식 참석차 우리나라를 찾았다.
○ ‘맨발의 군인’ 아바시니아의 용사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황제의 6·25전쟁 참전 결정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1936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민병대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나라를 빼앗긴 황제는 영국에 망명했고 1941년에야 영국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고 왕위에 복귀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 자유와 평화에 대한 남다른 의지가 이때 증폭됐음은 물론이다.
이후 그의 삶은 자유와 평화의 구현에 바쳐진다. 그러다 1974년 공산정부와 손잡은 군부의 쿠데타로 다시 왕좌에서 내몰린다. 그리고 이듬해 암살당한다. 1980년대 수백만 명의 아사와 기아로 점철된 에티오피아의 비극. 황제 폐위 후 러시아, 북한과 손잡은 에티오피아 공산정권의 소산이다.
6·25전쟁 당시 황제의 파병 결정은 신속했다. 유엔이 참전을 결의하자 가장 먼저 파병을 발표했다. 그들은 황제의 근위대였고 또 용감했다. 산악전에 능해 가평전투에 투입됐다. 격전지 중 하나였다. 그 전장에서 그들은 맨발이었다.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1932∼1973·1960년과 1964년 올림픽 우승자)를 탄생시킨 맨발, 아베베가 “내 조국 에티오피아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밝힌 그 맨발이었다. 전사 121명, 부상 536명. 군인 상당수와 아베베, 그들은 모두 셀라시에 황제의 근위대였다.
참전용사 가운데는 포로나 실종자가 단 한 명도 없다. 맨발로 싸우고 죽거나 다칠지언정 붙잡히거나 도망치지 않는다는 ‘아바시니아 용사’(아바시니아는 나일 강이 발원하는 아프리카 대륙 동부의 고원으로 에티오피아가 자리 잡은 곳이자 에티오피아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전까지 사용한 옛 이름)의 무용담. 58년이 지난 지금도 참전용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그리고 그 ‘전설 아닌 전설’을 나는 지금 ‘전설’이라는 이름의 차(혼다 레전드)를 몰고 그 전설이 깃든 ‘황제의 가지 않은 길’에서 추적하는 절묘한 아이러니를 여기 거제의 ‘황제의 길’에서 겪고 있다.
경남 거제=조성하 여행전문 기자 summer@donga.com
◆ 여행정보
◇숙소 ▽토토펜션=망치고개 아래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바다 풍경을 가장 멋지게 감상할 수 있는 산등성의 전망 좋은 펜션. www.ntoto.net
◇드라이브 코스 ▽여차∼홍포=거제섬 남단. 여차마을의 몽돌해변과 멀리 매물도와 대·소병태도 등 섬 풍광을 낙조와 더불어 감상하는 경관도로(비포장 3km). ▽칠천도=거제섬 북단인 장목면 서쪽의 섬(연륙교). 해안일주도로가 멋지다.
◇맛집 ▽황금고디탕=‘고디’는 다슬기를 일컫는 지역 말. 된장을 풀어 끓여내는데 열기(바다생선)튀김 등 밑반찬도 푸짐. 8000원. 장승포시 유람선터미널 근방(거제시 장승포동 499-29). 점심시간에는 예약 필수. 055-681-5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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