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3%에 불과하다. 야누스 같은 양면성이 보라색의 얼굴이다. 보라색은 누구에게나 허용된 색이 아니었다. 감히 보라를 감당할 수 있는가…’ ‘데어 투 비 더 퍼플(Dare to be the purple)’. 2006년 등장한 현대카드의 ‘더 퍼플’ 카드 광고는 보라색이 주인공이었다. ‘감히’ 도전해야 하고, ‘감당’해 내야 하는 색으로 표현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라색을 좋아하면 얄궂은 정신병자라는 속설, 여기에 ‘게이’설이 나돌던 ‘꼬꼬마 텔레토비’의 보라돌이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했으니. 보라는 그렇게 낯설고 폐쇄적인 존재였다.
# 못 보던 세상 이제 시작이야
그로부터 2년. 보라는 ‘새로운 세상’이 됐다. 최근 등장한 ‘SK 브로드밴드(옛 하나로텔레콤)’의 이미지 광고 ‘시 더 언신(See the unseen)’은 ‘더 퍼플’ 카드와 마찬가지로 보라색을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위상은 2년 전과 달라졌다. 비둘기의 몸을 하고 있는 소녀, 고양이 머리를 한 부엉이….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형상화한 이 광고에서 보라색은 ‘못 보던 세상 이제 시작이야’라는 CM송과 버무려지며 신비롭게 포장됐다. 광고를 제작한 TBWA의 박웅현 CD는 “과거 금기로 여겨졌던 보라색이 이제는 새로움과 창의적인 이미지를 상징하는 색으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난해한 패션 디자이너의 괴팍한 주장일까? 아니면 ‘보라 마케팅’을 펼치는 기업의 상술(商術)일까? ‘핫핑크’의 주도권을 보라가 이어받은 듯 패션, 정보기술(IT) 기기 등 각계각층에서 보라색이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는 퍼플 컬러가 대세예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디자이너 앙드레 김. 그의 예언이 맞기라도 한 듯 지금까지 보지 못한 보라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 잇(IT) 컬러? 아이티 컬러? 퍼플 컬러!
“품절이에요. 품절!”
지난달 처음 공개된 애플의 ‘아이팟’ 나노 4세대는 총 아홉 가지 색으로 구성됐다. 이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게 바로 보라색이다. 지난해까지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색은 검은색, 은색 등 무채색 계통. 이 때문에 국내 수입비율도 검은색 14%, 은색 13% 순이었으며 보라색은 7%에 그쳤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박정훈 애플코리아 차장은 “보라가 검은색 나노에 이어 판매량 2위(점유율 12%)를 나타내며 매진 사례를 빚고 있다”고 말했다.
보라색 MP3플레이어가 주목을 받은 것은 올해 초 러시아에서 비롯됐다. MP3플레이어로 러시아 시장 공략에 나선 삼성전자는 보라색 잎사귀 무늬를 입힌 ‘라플레르 T10’ 모델을 공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1∼3월) 러시아 MP3플레이어 시장의 15.9%를 점유했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디자인팀의 김금술 수석 디자이너는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해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보라색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휴대전화도 마찬가지. 배우 오드리 햅번을 내세운 LG전자의 ‘시크릿 폰-루비 바이올렛’과 보라색 연꽃무늬를 입힌 미국 진출용 모델 ‘로터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LG전자는 ‘디오스’ 냉장고 조명, ‘휘센’ 에어컨 조명 등에도 보라색을 메인 컬러로 내세우는 등 공격적인 ‘보라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LG 디자인연구소의 박상민 선임 연구원은 “여성성이 강한 핫핑크와 달리 보라는 중성적인 이미지가 특징”이라고 말했다.
미니홈피, 블로그 등에서도 보라는 잘 나간다. 최근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베스트 배경 그림(스킨)으로 꼽힌 ‘아 유 해피?’ 상품은 이례적인 보라색 상품으로, 지난달 19일 판매 첫날에만 65만 원(1개 700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지금까지 3000개 넘게 팔렸다.
○ 보라적 생활? 우아한 생활? 신비로운 생활!
보라의 부활은 올해 가을 겨울 고풍스럽고 우아한 클래식 스타일의 패션이 유행을 하면서부터였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명품 브랜드를 비롯해 퍼플 데님을 내놓은 ‘빈폴 진’ 같은 캐주얼 브랜드, 심지어 포도 이미지를 내세운 속옷 브랜드 비비안의 ‘웨이브핏 브라’까지 보라가 패션계 최신 유행 컬러 대접을 받고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일까? 화장품 업계의 최근 화두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내세운 ‘퍼플 메이크업’이다. 얼마 전까지 ‘생얼 열풍’과 맞물려 투명 피부를 강조한 옅은 화장이 인기였으나 올해는 보라색을 내세운 짙은 화장법이 대세다.
지난해 LG생활건강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바이 테리’는 ‘미스티시즘, 퍼플’이라는 화장법을 선보였고 ‘랑콤’은 보랏빛이 감도는 ‘모브 컬러’ 립스틱을 내놓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최희선 씨는 “보라색 화장은 중성적이고 강한 이미지를 표현한다”고 말했다.
신비로운 보라색 이미지는 액세서리에도 이어졌다.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털 브랜드 ‘스와로브스키’는 이번 시즌 보라색 유색 크리스털을 공개했다. ‘패시지 오브 나이트’라는 제목의 이 액세서리들은 투명한 크리스털 제품이었던 과거와 달리 남성적이고 터프한 이미지가 주를 이뤘다.
○ VIP와 ‘온리 원’의 시대
얼마 전 뉴욕타임스는 보라색 민소매 원피스를 즐겨 입는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부인 미셸 오바마에 대해 “그녀는 승리하기 위해 입는다”라고 평했다. ‘보라 공주’라 불리는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 카를라 브루니 역시 ‘크리스티앙 디오르’ 상표가 붙은 보라색 원피스 차림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보라의 시대. 21세기의 보라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 정신 분열 등의 나쁜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다.
보라색이 주류로 떠오른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성보다 감성이 중시되는 시대적 배경을 꼽는다, 상상력이 경쟁력인 시대에 ‘베스트 원(모범생)’보다 ‘온리 원(개성파)’이 더 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
‘야후’는 보라색을 회사의 대표 색으로 정했다. 김영재 야후코리아 상무는 “지금의 보라색은 창의적이고 개성 강한 이미지를 형상화한다”며 “불안한 심리마저도 특이하다고 평가받는 감성 시대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이런 해석도 있다. 김민경 한국 케엠케 색채연구소 소장은 “소비자들은 보라를 통해 고풍스럽고 귀족적인 이미지를 소비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경향은 보라색에 ‘도전’하며 스스로를 차별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신세대들은 보라색 재킷을 입고 보라색 MP3플레이어를 들으며 남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만끽하려 한다”며 “이는 결국 ‘보라색을 소비할 정도의 캐릭터’임을 드러내고 싶은 의지가 담긴 것”이라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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