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그 동네’말고 ‘옆 동네’가면 숨통이 틘다

  • 입력 2008년 10월 31일 02시 57분


새 영화 소개.

제목: ‘옆 동네’

등장인물: 여자 다섯, 남자 하나

촬영 장소: 서울 마포구 홍익대 옆 상수동과 그 맞은 편 서교동,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뒤쪽 ‘오프(Off) 가로수길’

줄거리: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자는 반가운 전화. 버릇처럼 그에게 말을 건넸다. “홍대 앞에서 보자” 또는 “가로수길 어때?” 그러나 친구는 ‘딴죽’을 걸었다. “요즘도 홍대 앞에 가니?” 당황스럽다.

강북을 대표하는 젊음의 거리 홍대 앞, 강남에서 가장 ‘핫(Hot)’한 사람들이 온다는 신사동 가로수길. 하지만 언젠가부터 바로 옆 친구의 말이 개미소리처럼 들리고, 친구와 나란히 길을 걸을 때면 수많은 사람이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이곳에 올 때면 어깨를 접는 버릇이 생겼다. 익숙한 그 동네가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여기 등장하는 청춘들이 선택한 대안은 바로 옆 동네다. 자신의 아지트였던 홍대 앞과 가로수길을 떠나 옆 동네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과거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았을 때의 풋풋함이 남아있다. 한적한 이곳에 정착한 이들은 아웃사이더일까, 유행을 개척하는 ‘트렌드 세터’일까.

100자 평: 일명 ‘내가 옆 동네로 옮긴 이유’에 대한 보고서. 홍대 앞 ‘스타벅스’, 가로수길 옆 ‘커피빈’을 버리고 옆 동네 다방커피를 찾아 나선 이들. 10월 31일, 방랑객들의 진실이 밝혀진다. 개봉박두!

Scene #1 홍대 옆 상수동과 서교동에서 ‘느리게 걷기’

“아들, 아빠가 목말 태워줄게. 저기 감 따볼래?”

골목 모퉁이에서 ‘왈왈’ 짖어대는 강아지, 빙그르 돌며 떨어지는 낙엽, 그리고 목말을 탄 채 감을 따는 꼬마…. 지척 홍대 앞은 여전히 자동차가 빵빵거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빠르기만 하다. 여기는 뭔가 다른 풍경. 한 템포 늦은 이 골목길을 직장인 김은경(32·여) 씨가 걷고 있다.

“홍대 앞은 새롭고 젊고…뭔가 빨라요. 하지만 그 옆 동네는 느리죠. 물건에 비유하면 재활용품 같아요.”

김 씨가 홍대 앞에 처음 들른 것은 15년 전 고등학생 때부터. ‘피카소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었다는 김 씨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압구정동의 오렌지족, 명동과 종로의 분주한 직장인들과는 다른 문화적 소양을 느꼈다. 대학생이 된 김 씨는 기찻길 옆 갈빗집, 기와집을 개조한 카페 ‘딩동’, 해병대 출신 주인이 미역국에 잔치국수를 말아주는 주점 ‘해적’ 등 홍대 앞에서 질퍽한 인간미를 느꼈다.

그렇게 ‘홍대인’으로 지내던 김 씨가 홍대 앞을 떠난 것은 2000년 이후부터. 클럽 문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홍대 클럽 데이’(매주 금요일 티켓 하나로 홍대 부근 클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행사)가 생겨났고 ‘할렘’, ‘NB’ 등의 힙합 클럽이 번창하면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패스트푸드점과 커피 전문점도 속속 생겨났다. 점점 걸음이 빨라진다고 느낄 때 김 씨는 ‘극동방송’ 쪽이라 부르는 상수동, ‘삼거리 포차’와 주차장 골목 뒤편으로 뻗은 서교동, 합정역 부근 등으로 대표되는 옆 동네로 ‘놀이터’를 옮겼다. 그는 “어느 순간 사람들에게 홍대 앞을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며 “나만의 공간을 찾고 싶어 옆 동네로 파고들었다”고 말했다.

상수동과 서교동 마니아로 산 지 3년째. 어느덧 ‘나만의 코스’도 생겼다. 늦은 아침 상수동에 닿은 김 씨가 가장 먼저 가는 곳은 ‘브런치’ 수제 햄버거 가게 ‘감싸롱’. 감나무집 주택을 개조해 만든 이곳에서 ‘아점’을 먹은 뒤 옆 골목 건물 2층에 있는 동네 미용실 ‘펄’에 들른다. 간판도 없을뿐더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은 미용실이지만 벨을 누르면 주인이 문을 열어준다. 자주색 초록색 등 형형색색의 벽 무늬도 마냥 즐겁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유유자적 걷기 편한 상수동길

보석 숨어있는 오프 가로수길

다음 코스는 최근 가장 뜬다는 ‘솔내길’. 서교동에서 합정역 방향에 있는 가로수길로 홍익출판사, 자음과 모음 등 출판사가 모여 있다. 천장 높이가 2m도 안 되는 1인용 카페 ‘토라에몽’부터 카페와 갤러리, 의상실을 모두 갖춘 복합공간 ‘미드나잇 스티치’ 등 생긴 지 한 달도 안 된 아기자기한 곳이 많다. 김 씨는 “이곳에 있다 보면 나처럼 홍대 앞의 북적거림을 피해 온 이들을 자주 만난다”고 말했다.

솔내길이 끝날 때쯤 홍대 근처라 믿기 힘들 정도로 한적한 옛날 느낌의 주택가 골목이 나온다. 한참을 걸으면 정원주택을 개조한 갤러리 카페 ‘에뚜와’가 보인다. 뜬금없이 만난 옛 친구랄까? 신기하게도 그곳에서 김 씨는 친한 언니 전계형(37·여) 씨를 만났다. 전 씨는 “이 동네에 새로 생긴 가게들은 건물을 다 허물지 않고 기본 골격과 원래 분위기를 남겨두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전 씨는 홍대 옆 동네를 ‘모자이크’라 표현했다.

방향을 바꿔 상수역 쪽으로 올라갔다. 개그맨 박명수의 캐릭터 중 하나인 ‘소년 명수’ 그림과 “우쥬 라이크 섬싱 투 드링크?”라는 유행어가 벽에 새겨진 코믹한 카페 ‘디디다’를 만날 수 있었다. 서교동 방향에 이를 때쯤 ET 인형이 한가롭게 앉아 있는 아기자기한 카페 ‘호호미욜’을 만났다. 주인을 찾자 직원 한 명이 “사장님 지금 고양이 밥 사러 외출하셨어요”라고 했다. 다른 동네에서는 들을 수 없는 ‘갓난아기’ 같은 말이 아닐까.

그곳에서 또 다른 옆 동네 마니아인 직장인 노승미(28·여) 씨를 만났다. 10년 전 ‘드럭’으로 대표됐던 홍대 앞 라이브클럽을 즐겨 찾았던 노 씨는 “예전엔 지하 클럽에 밴 곰팡이 냄새와 담배 냄새가 홍대 앞을 대표했지만 지금은 클럽데이면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개성 없는 유원지로 변했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홍대 앞의 감성을 찾아 나선 지 3년째. 노 씨는 “홍대 앞을 떠나는 것은 나만의 분위기를 찾아 그 느낌을 소비하고 싶은 심리가 담긴 것”이라고 말했다.

Scene #2 오프 가로수길에서 ‘숨은 그림 찾기’

‘발레파킹(주차대행)’ 안내. 1일 주차요금 주민 3만 원, 업무차 외부인 5만 원….

27일 낮 가로수길은 한마디로 주차장이었다. 평일 낮에도 이미 수많은 차들이 길 양옆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차대행 표지판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차들. 그 속에서 대학생 김누리(23·여) 씨가 손짓하고 있었다.

“옆길로 혹은 뒷길로 빠지세요.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재미난 곳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인도 옆 가로수가 시원하게 뻗었다 해서 이름붙은 압구정, 신사동의 가로수길. 하지만 그 고즈넉함은 이제 사라졌다. 대안은 ‘오프 가로수길’, 즉 신사동 J타워 쪽인 가로수길 뒤편과 한남대교 쪽인 가로수길 오른편이다.

3년 전 가로수길에 처음 들렀던 김 씨는 특유의 고풍스러움에 반해 이 근처로 이사할 정도로 가로수길 마니아였다. 나른한 주말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고 가로수길 대표 카페인 ‘블룸 앤드 꾸떼’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이 김 씨에겐 지상 최대의 낙(樂)이었다.

하지만 여유로움도 잠시. 이른바 ‘핫 플레이스’로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렸고 ‘가로수길 표’ 커피 대신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젊고 톡톡 튀는 디자이너 숍들도 대부분 장사가 되는 보세 가게로 변했다. 김 씨는 “체인점이 들어선 후부터 동네 특유의 개성이 사라지고 번잡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부동산 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가로수길 부근의 한 공인중개사는 “명소라 소문난 후 1년 새 임차료가 크게 올라 현재 10평에 월 350만 원이 평균”이라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존 가로수길에서 오프 가로수길로 옮기는 가게도 많다. 이들이 떠난 가로수길은 늘 ‘윙윙’거리는 날카로운 공사장 기계음으로 가득하다.

지난해 여름부터 오프 가로수길로 무대를 옮긴 김 씨의 ‘유유자적 코스’는 압구정동부터 시작한다. 일본에서 수입한 아기자기한 그릇과 캐릭터 상품을 파는 주방용품점 ‘카렐’, 벨기에산 호가든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여섯시 이분’을 지나면 나무 향기가 가득한 오프 가로수길의 유일한 북카페 ‘P532’가 나온다. 주변은 시끄럽고 바쁘게 움직이지만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 느려 마치 전쟁 속 피란처를 연상케 한다.

오프 가로수길을 대표하는 일식집 ‘풍월’과 카페 ‘페이퍼가든’을 지나면 한적한 주택가와 동네 슈퍼마켓이 나온다. 끝인 줄 알았지만 오프 가로수길의 하이라이트는 이제부터였다. ‘세븐일레븐’ 편의점을 지나 신사동 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동네 구멍가게 위치에 4인용 레스토랑 ‘뜨라또리아’가 나타났고 그 옆에는 쇼핑 칼럼니스트 배정현 씨의 작업실 겸 워터바 ‘워시’도 볼 수 있었다. 마침 가게 문을 열고 있는 배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배 씨는 “초창기 가로수길을 찾던 사람들은 대학가처럼 변한 지금의 가로수길에서 벗어나 한적한 오프 가로수길에 아지트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한적함 때문만은 아니다. 길에서 만난 또 다른 오프 가로수길 마니아인 디자인 회사 ‘DDS’의 유창범(37) 대표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 다른 사람이 모르는 나만의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공간에서 한가롭게 쉬길 바라는 옆 동네 사람들. 오늘도 그들은 그렇게 옆으로, 또 옆으로 움직이고 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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