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좋은 日도 균열로 실패” 설득
원로 고고학자들이 전하는 ‘비화’
◇한국 고고학 60년/한국고고학회 엮음/456쪽·1만8000원·사회평론
한반도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이젠 초등학교 고학년생도 안다. 그런데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고학자들이 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에는 구석기문화는 없었다는 일본 학자들의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존재는 1964년 충남 공주시 석장리에서 구석기시대의 뗀석기(돌을 깨서 만든 돌연장)가 발견된 뒤에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한국 구석기 고고학의 개척자’라 불리는 손보기(86) 공주 석장리박물관 명예관장이 있었다.
손 관장이 석장리를 찾았을 때 큰비가 내린 공주시 금강 주변은 언덕이 무너져 있었다. 그곳에 절벽처럼 서 있는 지층이 드러났다.
한국고고학회가 기획해 2년 만에 내놓은 이 책은 한국 고고학의 산증인인 원로 학자 7명을 제자나 후배 학자가 인터뷰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 고고학을 한국인이 주도한 것은 1946년 광개토대왕의 시호가 새겨진 청동 그릇이 나온 경북 경주시 호우총 발굴 때부터였다. 일제강점기 발굴에선 한국인은 배제됐고 선사학을 전공한 학자도 없었다. 이 책은 한국 고고학을 처음 시작한 1세대 학자들의 비망록인 셈이다.
구석기시대의 동물 뼈가 많이 출토된 충북 제천시 점말동굴 발굴 이야기가 흥미롭다. 손 관장은 1970년대 초 제천시와 단양군에서 동굴 유적을 조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천 한약재 시장에 오래된 짐승 뼈들이 팔 것으로 나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를 단서로 물어물어 1973년 점말동굴을 찾았고, 이곳에서 털코뿔이, 동굴곰, 짧은꼬리원숭이 등 동물 뼈가 쏟아져 나왔다.
경북 경주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금관을 발굴한 김정기(78) 전 한림대 교수는 불국사 복원과 관련한 비화를 들려줬다. 1960년대 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불국사 복원, 발굴을 국가가 지원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불국사 복원 공사를 철근콘크리트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 김 교수는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된 일본의 시텐노(四天王) 사를 찾았다. 건축물이 내려앉아 생긴 균열을 사진으로 찍었다. “일본의 기술이 좋다지만 철근콘크리트로 하면 일본에서도 이렇게밖에 안 된다”고 전했다. 김 교수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보는 불국사는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 됐을 수도 있는 셈이다.
정재훈(70)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는 지금 경주 모습을 갖추게 한 1970년대 경주관광개발사업에서 박 전 대통령이 보여준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을 들려준다. 경주 문화유산을 보존 정비하기 시작한 당시는 1인당 국민소득이 289달러밖에 안 되는 시절이다.
“이게 경제 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이상한 거야. 안 맞지. 미추왕릉(발굴 및 보전사업)에 3억6000만 원의 예산이 들어갔어요. 사람들이 ‘자네는 뭐 부잣집 큰아들이야? 3억6000만 원 있으면 큰 공장을 2, 3개 짓는다’고 말했죠.” 정 교수는 그런 상황에서도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박 전 대통령의 역사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 교수가 들려주는 또 하나의 일화. 황남대총 금관이 발굴되자 청와대에서 금관을 가져오라고 했다. 조사와 기록을 마친 뒤 가져갔고 박 전 대통령에게 금관의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자 수고했다며 발굴팀에 격려금을 줬다. 정 교수는 “돈을 받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야 고고학 하는 사람을 존경하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1960년대까지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 고인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처음 시도해 청동기시대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 경북 금호강 유역의 고대사회 발굴과 복원의 선구자로 불리는 윤용진 경북대 명예교수 등 원로 고고학자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가득 담겼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