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진 지 40년이 넘은 푸른아파트. 주민들은 재건축을 원하고 있지만 진행은 지지부진하다. 이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파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현수막을 상가의 검은 띠처럼 동 앞에 걸어두는 방식으로 당국에 항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푸른아파트가 초상집처럼 우울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푸른아파트의 네 개 동은 오히려 ‘해머에 두들겨 맞고 포클레인에 파헤쳐져’ 허물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집’이란 본분을 잊지 않고 주민들을 돌보기 위해 애쓴다. 그런 그들 앞에 심술쟁이 소년 기동이가 출현했다. 기동의 부모가 아이를 2동에 사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사라져 버린 것.
청소년 성장소설 ‘완득이’의 작가인 저자는 재건축을 앞둔 낡은 아파트를 의인화한 이번 동화에서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을, 기동이란 장난꾸러기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따뜻하게 그려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파트 각 동은 사람처럼 살아 숨쉰다. 1동은 벼락을 맞은 뒤부터 치매든 노인처럼 헛소리를 잘하고 2동은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해 잔정이 많다. 3동은 기운이 없이 축 처져 있고 4동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이사 오면 몸을 비틀어 놀래는 식이다. 이들은 기동이가 이곳으로 오면서부터 골치를 앓는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 기동이는 말썽쟁이다. 부모의 무관심으로 한 해 늦게 입학했기에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많다. 전학 간 첫날 반 아이들과 치고받고 싸우거나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며 벽에 ‘이 아파트 보는 사람은 다 죽는다!’고 낙서를 한다. 하지만 기동이가 벽에 난 금을 따라 산등성이를 그리고 녹물이 새나오는 곳에 작은 집을 그려내는 것을 보고 아파트는 놀란다. 노상 싸우고 천방지축이기만 할 것 같은 기동이는 만화를 그리는 데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동이는 4동에 살고 있는 괴짜 만화가 아저씨에게 그림을 배우고 비슷한 처지로 할아버지에게 맡겨진 단아와 친해지며 점차 푸른아파트 생활에 적응해 간다.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뭔지, 새끼 밴 도둑고양이 등 주변의 하찮고 작은 것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뭔지도 배워간다. 그 즈음 주민들은 재건축 허가를 받게 된다.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보내는 집이나 목이 메긴 마찬가지다. 기동이는 쉬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머니가 보낸 푸른아파트에는 당신 삶의 면면이 함께 깃들어 있고 기동이가 보낸 푸른아파트에는 이제 막 발견한 꿈과 우정, 희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푸른아파트가 사라지면 그 속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행복하고, 슬프고, 감사했던 날의 추억도 바스러져 버릴까. 오랜 친구를 보내듯 “니도 고생 많았다”고 푸른아파트에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할머니와 “야, 푸른아파트! 잘 가라, 푸른아파트!” 하고 소리치는 기동이의 외침에 마음이 찡해진다.
사물에도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따스한 시선과 기동이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어우러져 시큰한 여운을 남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