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딸에게 은잔 하나를
큰딸에게 전 재산을…”
◇폭풍의 밤/세사르 비달 지음·정창 옮김/268쪽·1만 원·다산책방
영국 런던 서북쪽의 작은 마을 스트래트퍼드어폰에이번의 한 변호사 사무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스트래트퍼드의 시인이자 이사벨 여왕의 극작가로 불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언장 공개를 기다리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큰딸 수재너도 마찬가지다.
수재너는 가족을 스트래트퍼드에 가난하게 살도록 내버려둔 채 런던의 극작가로 명성을 떨치다 죽은 아버지에게 별다른 존경심이나 연민이 없다. 막내 남동생이 페스트로 앓아 죽을 때도 셰익스피어는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냉혹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가족들도 그가 재산에 대해 어떤 유언장을 써뒀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변호사는 참석자들을 확인한 뒤 마침내 유언을 공개한다. 그런데 뜻밖의 내용에 모두는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소설을 주로 쓰는 스페인 작가인 저자가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유서 한 장을 상상의 소재로 삼아 쓴 소설이다. 이를테면 사실과 허구가 결합된 팩션(faction)인 셈인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실제 셰익스피어의 유서 내용은 소설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아내에게는 다 낡아빠진 침대 하나를 유산으로, 둘째 딸에게는 은잔 하나를 유산으로, 나머지 모든 유산은 큰딸 수재너 셰익스피어에게로.’
무엇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아내와 작은딸을 이토록 무시했으며 생전 그리 애틋해하지도 않았던 큰딸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었을까. 소설은 본격적으로 유언장에 감춰진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추적한다.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 수재너는 의문의 해답을 유언장 공개에 참석했던 한 배우에게서 찾는다. 그는 스스로를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작업했던 극단의 배우라고 소개한다. 푸른빛이 감도는 옷을 입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는 폭풍우가 치는 어느 날 밤 그녀를 따로 불러내 가족들이 전혀 알지 못한 비밀을 들려준다.
그는 수재너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셰익스피어의 출세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이 다름 아닌 셰익스피어와 어머니 앤 해서웨이의 첫 만남에서 따온 이야기라는 것, 그가 평생 아내와 가족들을 그리워했다는 것, 또한 ‘가족을 내팽개쳤다’는 어머니의 비난과 달리 매달 일정액을 생활비로 보내 왔다는 것 등이다. 그뿐만 아니라 ‘베니스의 상인’ ‘폭풍우’ ‘오셀로’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수재너 자신과 어머니를 모델로 했다는 것과 막내 동생이 죽을 때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도 밝혀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유언장을 둘러싼 진실과 푸른색 옷차림의 사내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게 되고 수재너는 아버지 셰익스피어에 대해 품고 있던 오해를 풀게 된다. 오히려 처절한 슬픔과 말 못할 외로움을 삭이고 있었을 아버지의 쓸쓸한 모습을 깨닫는다.
유언장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에 셰익스피어의 명작들이 심심치 않게 인용되지만 관련 내용을 몰라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모든 비밀이 한 남자의 술회로 밝혀지게 되는 구성과 반전의 파격이 약하기는 하지만 가볍게 읽기에 좋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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