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와 삶 어우러진 집]<6>김헌태씨의 평창동 주택

  • 입력 2008년 11월 5일 03시 01분


언덕위 회색 아연지붕-목재벽

울긋불긋 이웃과 ‘은은한 조화’

남북으로 쭉뻗은 27m 통로

건폐율 낮아도 넓은 느낌

서울 종로구 평창동 93-15. 북악터널로 향하는 오르막길 옆 언덕 위 주택가에 아연 지붕을 덮은 목재마감 벽의 집 한 채가 있다.

붉고 푸른 기와 박공지붕(양쪽으로 경사진 지붕)을 가진 평범한 집들로 채워진 이 동네에서 회색 아연은 이질적인 재료다. 하지만 이 집은 어색한 이물감 없이 재치 있는 엇박자 악센트처럼 풍경에 스며들었다. 건축가 김헌태(47) 씨가 자신의 집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이웃집의 구조와 공간배치를 중요한 정보로 반영한 까닭이다.

“제한 요소를 번거로워하기보다 즐기는 편입니다. 설계를 게임으로 보면 이웃집이 요구하는 제한 요소는 게임을 진행하는 규칙이라 할 수 있죠.”

보수적 성향을 벗어난 그의 설계안은 처음에 이웃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모던한 느낌의 단순한 직육면체 박스 모양이었던 초기 계획이 ‘시야를 가린다’는 항의를 받은 것. 그는 동네 언덕 꼭대기에 올라 지붕들을 꼼꼼히 살핀 뒤 설계 방향을 틀었다.

아연 박공지붕은 주변의 기존 집들이 구축한 디자인 문맥을 따르는 한편 재료를 통해 은근한 파격을 노린 장치다. 출입구 앞에 서서 바라본 이 집의 모습은 바로 옆 벽돌집에 비해 도드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더 위쪽 가나아트센터에서 내려다보면 길쭉하게 늘어선 4개의 회색 아연지붕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 집은 변경 기간을 포함해 꼬박 1년을 설계하고 15개월의 공사 끝에 8월 완성됐다. 지상 2층에 지하 1층, 대지면적 661m²에 건축면적은 199.5m². 건폐율이 30%에 그친 것은 “집과 집 간격을 최대한 띄워 달라”는 이웃의 요청 때문이다.

건폐율이 낮지만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남북으로 길쭉하게 놓인 공간 내부에 시선을 가로막는 요소를 없앤 덕분이다. 이 집 내부에는 여닫이문이 거의 없다. 방과 거실, 통로를 구분하는 가림막 같은 미닫이문은 대개 열어 놓는다.

“남쪽 끝 창에 기대서서 27m 앞 북쪽 끝 창을 막힘없이 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 뒀습니다. 깊은 공간감을 느끼면서 통로를 걷는 동안 다양한 시각적 체험을 할 수 있죠.”

2층 통로 천장 위 길쭉한 박공지붕은 세 지점에서 끊어져 4개의 나란한 지붕들로 보인다. 단절면의 박공벽 격자창은 자연 환기와 채광을 돕는다. 길쭉한 지붕을 토막 낸 것은 이웃집 지붕의 길이를 감안한 디테일이다.

철근콘크리트 외벽에는 각진 나무막대를 촘촘히 둘러 감쌌다. 길쭉한 나무막대의 이미지는 길쭉한 평면 공간, 길쭉하게 열린 창문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패턴을 여러 크기로 쪼개서 재료를 바꿔가면서 ‘게임’을 벌인 흔적이다. 직접 디자인한 가구에도 이런 길쭉길쭉한 이미지가 엿보인다.

차가운 빗물을 차가운 아연으로 막아내면서 그 아래 나무 사이에 그가 소중히 감춘 것은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다. 기다란 주출입구 계단을 따라 올라와 제일 먼저 눈앞에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들 도윤(17)이 방으로 비스듬히 열린 길쭉한 창문이다.

“독특한 형태도 중요하지만 집은 우선 집답게 편안해야죠. 아들 방 옆 세 마리 강아지 집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입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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