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와 추(醜)의 차이는 동의어군에 속하는 말을 각각 따져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아름다운’과 비슷하게 쓰이는 말은 예쁜, 귀여운, 기분 좋은, 매력적인, 사랑스러운, 우아한 등이다. 반면에 ‘추한’과 비슷한 느낌의 말은 불쾌한, 끔찍한, 소름 끼치는, 역겨운, 비위에 거슬리는, 혐오스러운, 더러운, 무시무시한 등이다.
미와 추에서 나타나는 이런 차이 때문일까. 고대부터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미에 대해선 새로운 정의를 꾸준히 보태왔다.
그래서 미에 대한 개념의 역사를 시간 흐름에 따라 재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추에 관해선 대접이 달랐다. 어느 시대에나 추함은 아름다움의 반대로서만 정의됐을 뿐 추함 그 자체에 대한 탐구는 없다시피 했다.》
2005년에 ‘미의 역사’를 펴낸 움베르토 에코는 추에 대해서도 같은 작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난해 이탈리아에서 이 책을 낸 직후 주간지 ‘오지’와의 인터뷰에서 “‘추함은 아름다움의 반대말이다’라는 말로 충분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한 대답을 보면 이 책의 집필 이유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아름답지 못한 것이 반드시 추한 것은 아닙니다. 추함은 아름다움보다 훨씬 다양합니다. 아름다움은 항상 몇 가지 기준을 따릅니다. 예를 들어 브리지트 바르도의 코와 그레타 가르보의 코가 다르긴 하지만 아름다운 코는 일정한 길이를 넘어가면 안 됩니다. 반면에 추한 코는 피노키오의 코에서부터 넓적코, 콧구멍이 셋인 코, 종기가 많이 난 코 등 많은 상상이 가능하지요. 따라서 추함의 이미지는 어마어마하게 풍부합니다.”
에코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추에 대한 시대별 개념을 살폈다. 대부분의 지면에 실린 회화, 조각, 사진들은 설명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모두 추함에 관한 작품들이다 보니 유쾌한 기분으로 보기는 힘들다.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선 불편함을 느낄 작품도 적지 않다.
추를 다룬 문헌은 고대부터 많았다. 그리스 문화는 육체의 이상적 비례를 제시할 정도였으니 추한 것에 대해선 가차 없는 평가를 내렸다.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테르시테스라는 인물에 대해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못생긴 자로 안짱다리에다 한쪽 발을 절었고, 두 어깨는 굽어 가슴 쪽으로 오그라져 있었다”고 묘사했다.
중세 사람들이 생각한 추는 대부분 반(反)기독교적인 것들이었다. 미술 작품에서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는 박해자의 모습은 천박하고 저속하게 그려졌다. 반면에 예수는 늘 큰 키에 잘생기고 섬세한 모습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였다.
당시엔 외설스러운 것도 곧 추한 것으로 연결됐다. “인류는 배설에 관한 모든 것,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항상 거북하게 여겨왔다”는 게 에코의 생각. 그런 생각을 반영한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성기를 지닌 프리아포스다. 어머니인 아프로디테는 그런 아들을 추하게 여기고 창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외설스러움도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추함으로부터 분리됐다. 인간 신체를 재현할 때 생식기가 표현됐다고 해서 분개하는 사람은 더는 없었다.
현대로 오면서 전통적인 미와 추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마르셀 뒤샹은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려 넣은 그림을 선보였고, 소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내놓기도 했다. 19세기 프랑스의 문인들은 에펠탑을 ‘나사못으로 죈 혐오스러운 주석 깡통’으로 치부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에펠탑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이처럼 추의 개념은 시간과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다. 에코는 말한다.
“우리는 ‘맥베스’의 제1막에서 마녀들이 ‘고운 것은 더러운 것이요 더러운 것은 고운 것이다’라고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