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께 얇으면서도 조직 치밀
밀랍은 ‘지리산 벌’서 채취
“뚝딱뚝딱 뚝딱뚝딱….”
11일 충북 청주시 국립청주배첩전수교육관. 충북 무형문화재 배첩장인 홍종진(58) 씨가 나무방망이로 한참 동안 한지를 다듬이질했다. 전통 한지 제작 때 종이를 두드려 부드럽게 하는 마무리 작업, 도침(搗砧)이다.
홍 씨의 도침은 이뿐 아니었다. 다듬이질 전 물을 뿌린 종이를 솔로 오랫동안 문지르고 폈다. 그 뒤 종이를 발로 골고루 밟았다. 다듬이질은 3단계였다. 다듬이질 뒤에도 발로 종이를 밟았고 종이가 마른 뒤 다시 발로 밟았다.
“종일 쉬지 않고 일해도 많아야 15장의 종이를 도침하는 고된 작업이지만 이렇게 해야 종이의 섬유 조직이 치밀해진다”는 게 홍 씨의 설명이다.
2005년부터 밀랍본의 보존과 복원 방법을 찾아온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밀랍본 종이와 밀랍의 성분, 제작 방법을 규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보 밀랍본을 제작 당시와 똑같이 재현한 뒤 이 재현품으로 600여 년의 훼손 과정을 압축 관찰하기로 했다. 재현은 5월부터 청주고인쇄박물관이 맡았으며 완성된 재현품은 11월 말 모습을 드러낸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의뢰를 받은 강원대 제지공학과 조병묵 교수 연구팀은 실록 밀랍본 종이를 분석해 밀랍본이 일반 한지의 3배에 가까운 m³당 0.8g의 고밀도 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밀랍본 종이의 섬유소는 어느 한 곳 뭉치지 않은 채 골고루 퍼져 조직이 치밀하면서도 두께가 얇았다.
섬유 조직이 치밀할수록 먹이 잘 번지지 않고 깨끗하게 글씨가 써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실록에도 이런 고급지를 쓰지 못했다. 고밀도 한지는 현대의 한지 제작 공정으로도 쉽게 재현하기 어려울 만큼 첨단기술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국내 유일의 5단계 도침 기술을 보유한 홍 씨에게 도침을 부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연구팀은 실록 밀랍본이 100% 고급 닥나무 섬유로 만들어진 사실도 알아냈다. 특히 강한 알칼리 성분에서 나타나는 수산화나트륨(NaOH)이 아니라 약한 알칼리 성분에서 나타나는 수산화칼륨(KOH)이 종이에서 검출됐다. 이는 밀랍본 종이의 제작 방법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됐다.
전통 한지는 표백을 위해 닥나무 껍질을 알칼리성 잿물에 삶는데 알칼리 성분이 강할수록 종이 섬유소가 손상되고 끊어져 종이의 질과 강도가 떨어진다. 밀랍본 종이는 섬유소가 길고 가늘게 살아 있었다. 고온 고압을 피해 천연 잿물에서 오랫동안 삶은 것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이를 바탕으로 요즘 한지 제조에 널리 사용되는 가성소다(양잿물)를 배제한 뒤 한반도가 원산지이면서 알칼리 성분이 약한 콩대를 천연 잿물 원료로 선택했다.
밀랍 성분도 밝혀졌다. 한국 중국 일본의 벌, 고래, 식물 등에서 추출한 여러 밀랍 성분을 밀랍본과 비교한 결과 지리산 벌에서 추출한 밀랍이 가장 유사했다.
다음 문제는 밀랍을 어떻게 종이에 발랐느냐는 것. △붓을 사용해 바르는 방법 △밀랍에 종이를 담갔다가 빼는 방법 △밀랍을 파우더처럼 종이에 뿌리는 방법 등이 가능한데 밀랍에 담그거나 파우더를 뿌리면 일정한 두께를 유지하기 힘들어 재현 밀랍본은 밀랍이 굳지 않도록 온도를 조절하면서 붓으로 바를 계획이다.
청주=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