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협상력 뒤에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 고려 어전회의 전통이 있었다.”
993년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거란군의 침입을 물리친 장위공 서희(徐熙·942∼998)의 협상력을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가 아닌 고려의 정치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춰 분석한 논문이 나왔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리고,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고려 서희의 협상력과 이를 가능케 한 고려의 외교 정책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과 서희 묘가 있는 경기 여주군이 19일 ‘서희의 재발견과 21세기 한국외교’를 주제로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여는 학술회의에서는 한중연 세종국가경영연구소 박현모 전통연구실장이 ‘서희의 협상리더십’이란 논문을 발표한다. 박 실장은 미리 배포한 논문에서 성종이 거란의 침략 소식을 듣고 소집한 당시 어전회의가 서희 협상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고 밝혔다.
“어전회의는 지금으로 치자면 국무회의 성격인데 그때 열린 어전회의인 ‘서경(지금의 평양)대토론’에서는 별의별 의견이 다 쏟아져 나왔다. 수십만 대군이 쳐들어와 나라가 패닉 상태에 빠진 상태에서 왕은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을 떼어주고 강화(講和)하자’는 주장 등을 경청하며 현명한 계책을 기다렸다.”
그는 고려사에서 신하들이 어전회의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왕이 여러 의견을 두루 취합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현종 때인 1031년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거란 연호를 쓰는 문제를 놓고 신하 60여 명이 논쟁을 했고 1107년 예종 때는 여진 정벌을 둘러싸고 윤관과 오연총이 격론을 벌였다는 것이다. 1109년 예종은 9성(城)의 반환 여부를 결정하기 전 문무 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 토론회를 열었다.
고려 왕조가 직언과 간언을 하는 신하들을 높이 평가한 점도 주목했다.
서희의 아버지 서필(徐弼)은 임금(광종)의 잘못을 거리낌 없이 지적했고 충혜왕 때 이조년은 워낙 직간(直諫)을 잘해서 왕이 발소리만 들어도 그가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을 단정히 한 뒤 기다렸을 정도였다. 왕에게 직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 국가적 위기 시에 계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박 실장은 또 협상 담당자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 성종의 리더십도 빠뜨릴 수 없는 협상력 강화 요인이었다고 했다.
성종이 서희를 거란의 소손녕과의 담판에 보내기로 결정한 뒤 재량권을 주고 믿었는데 “국가위기 사태에서 왕이 신하의 협상 재량권을 거의 전적으로 인정한 것이 협상력을 높이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박 실장은 외교협상에 있어서 당파를 넘어서는 협상자의 자세 또한 외교력을 강화시켰다고 분석했다.
그는 “서희는 ‘온 백성의 생명이 걸린 문제’라며 당파의 의견을 떠나 협상이 끝날 때까지 공적인 태도를 견지했다”며 “소손녕이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협상자가 사(私)를 넘어 공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상대방도 설득할 수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이 회의에서는 정윤재 한중연 교수가 ‘서희 콘텐츠의 현대적 활용 및 정책제안’,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가 ‘서희 외교의 국내외적 영향’ 등을 발표하며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가 ‘우리 시대의 서희, 그리고 서희외교’라는 주제로 기조 강연을 한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