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무대에 오르는 것은 10년 만이다. ‘아빠 힘내세요’란 노랫말이 절실하게 와 닿던 1998년이었다. 작품이 다시 선보이는 2008년 겨울은 공교롭게도 다시 경기불황의 한파가 몰아치는 때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1905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방의 유대인 마을을 배경으로 가난한 우유가공업자인 테비예가 아내와 딸들에게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주인공 아버지 ‘테비예’ 역을 맡은 노주현(62) 김진태(57) 씨를 18일 오전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극장 리허설을 앞두고 의상과 장화를 갖춘 김 씨는 흰 수염을 붙이고 있었다. 오후에 리허설이 예정된 노 씨도 일찌감치 나와 있었다. 그는 “김진태 씨는 10년 전에도 이 작품에 섰고 뮤지컬 베테랑이기도 하지만 난 신인이라 다른 배우들 연습하는 것도 열심히 봐야 해요”라면서 웃었다. 노 씨가 뮤지컬에 도전하는 것은 연기 경력 40여 년 만에 처음이다.
무대에 선 김 씨가 테비예의 독백을 읊조렸다. “가만 있어봐, 아담과 이브 때도 중매쟁이가 있었나? 아, 있었지. 그러고 보니 그때랑 같은 중매쟁이(신)인 거로구먼.” 둘째딸 호들이 혁명가 페르칙과 결혼한다고 하자 극구 말리던 테비예가 마음을 접는 장면이다.
“나는 이 대사가 마음에 와 닿아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테비예가 딸의 사랑을 받아들이잖아요. 세상 어느 부모들이 이해 못할까.”
공들여 키운 딸이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김 씨도 뜯어말렸다(김 씨의 딸은 뮤지컬배우 윤지 씨다). 하필이면 배우라니, 고생문 훤한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배우 아버지였다. “그래도 결국 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돈 많은 푸줏간 주인과 결혼시키려던 첫딸은 가난한 재봉사를 선택한다. 그토록 전통을 중시한 유대인 가족인데 셋째딸은 유대인이 아닌 러시아 사내를 제 짝이라고 데려온다. 테비예는 ‘딸들이 어느 하나 내 뜻대로 되질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엄격한 아버지이지만 테비예는 그래도 종내 자식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북돋워준다.
김 씨의 연기를 보던 노 씨가 말했다. “내가 연극영화과에 간다고 했을 때 우리 아버지가 엄청나게 반대하셨어요. 그런데 자식 고집 못 꺾으셨죠. 마음 많이 상하셨겠지요. 나중에 무대에 선 걸 아버지가 보시게 됐는데, ‘저놈 끼가 있구먼’ 하십디다. 테비예처럼 받아들이신 거죠.”
테비예가 마누라 골데를 설득하느라 꾀를 내는 장면이 이어진다. 첫딸 편을 들어주느라 마누라에게 “꿈에서 푸줏간 주인 전처가 나와서 결혼을 반대하더라”라고 말을 지어낸다. “이거 딱 한국 남자들 얘기 아냐? 마누라 눈치 보는 게.” 김 씨가 말하자 배우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 “맞아, 요즘 연습 나오기 전에 마누라가 꼭 아침밥을 차려주는데, 가장 노릇하느라 애쓴다는 뜻인 것도 같고 더 열심히 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같고….” 노 씨가 말을 덧붙이면서 웃었다.
작품이 올라가기도 전에 삼성건설래미안, 산업은행, 비씨카드에서 단체로 2만 장을 예약했다. 어려운 경기로 어깨가 무거운 때 넥타이 맨 아버지들의 호응이 컸다는 얘기다.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 ‘가족’의 이름을 위해 온 인생을 다 바치는 사람, 자식 앞에선 무뚝뚝하고 엄해도 자식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들어주고 싶은 사람, 나이 들어선 아내에게 큰소리 못치고 눈치 보기 바쁜 사람…. 1905년 유대인 테비예의 모습은 2008년 한국의 아버지들과 그대로 겹쳐진다. 그래서 두 배우는 “자식들이 아버지 손을 잡고 이 뮤지컬을 보기를, 아 우리 아버지가 저러셨지, 하고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입을 모은다. 두 사람은 유명한 노래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을 함께 흥얼거렸다.
“이 아가씨가 내가 안고 다니던 그 어린 소녀인가? 이 청년이 그 어린 장난꾸러기였던가? 그들의 갈 길을 어떻게 도와주나? 해가 뜨고, 또 해가 지고 끊임없는 계절들이 오고, 또 가고 세월은 기쁨을 주고 눈물도 주었네….”
21일부터 12월 2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3만∼12만 원. 02-501-7888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