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사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건 그만큼 요즘 세대의 연애관이 개인의 욕망을 더 중시한다는 방증이다”
음악평론가 김작가 씨
10년 전 아이돌 가수의 노랫말에는 ‘소망’ ‘영원’ ‘꿈’ ‘약속’ 등의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1998년 발표된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내 모든 걸 원한다면 너에게 줄게/난 니 꺼야)와 S.E.S의 ‘아임 유어 걸’(너에겐 그 어떤 말보다 넌 내 꺼라는 말이 듣고 싶어)이 대표적인 예. 핑클 S.E.S 등 1998년 인기를 끌었던 여성 아이돌 그룹의 가사 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길 소망한다.
요즘 아이돌 가수의 가사 속엔 누군가를 소유하겠다는 욕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방신기의 ‘주문’(넌 내게 미쳐/넌 나의 노예)은 ‘노예’라는 표현을 통해 상대방을 독점적인 소유물로 표현한다. 원더걸스의 ‘노바디’(I want nobody nobody but you/난 다른 사람은 싫어 네가 아니면 싫어)에서는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연인과의 정신적 교감보다 육체적 애정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은 종종 타인의 육체를 대상화, 사물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룹 2PM의 ‘10점 만점에 10점’(그녀의 입술은 맛있어 입술은 맛있어/10점 만점에 10점/그녀의 다리는 멋져 다리는 멋져/10점 만점에 10점)에서는 여자의 신체 부위에 각각 점수를 매겼다.
웹진 ‘음악취향 Y’의 칼럼니스트 최지호 씨는 “10년 전 아이돌이 추상적인 가치를 에둘러 표현했다면 요즘에는 좀 더 구체적이고 날것의 언어로 욕망을 드러내거나 성적 행위를 묘사한다”고 말했다.
2 내 탓 → 네 탓
10년 전 아이돌 가수의 노랫말의 경우 겸손과 자기희생의 정서가 강했다면 요즘에는 자기주장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1998년 발표된 디바의 ‘왜 불러’(왜 불러 날 잡은 건 너의 실수야/나보다 좋은 여잔 얼마든지 있는데)와 반대로 올해 발표된 태양의 ‘죄인’(내가 잘못되면 너 때문인지 알아/날 망치게 한 원인 모두 다 너니까/다른 사람을 만나 불행해 주겠니/기도해 줄 테니)에서는 이별의 원인을 상대로 돌리는 것을 넘어 타인의 불행을 빌기도 한다.
애인이 변심해 바람을 피우는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1998년 인기를 끌었던 젝스키스의 ‘너를 보내며’(내가 아닌 사람과 함께 있는 널 봤어/모든 걸 이제 단념해야겠지/이제 사랑했던 널 위해 먼저 떠날게)가 모든 걸 단념하고 상대를 위해 떠나주겠다고 했다면, 다비치의 ‘사랑과 전쟁’(두 번 다시 바람피지 마/니가 매달려 만난 거잖아/어떻게 날 두고 다른 여잘 만날 수 있니/내게 더 정말 멋진 남자들/가끔은 내게 다가와 흔들릴 때도 있어)은 상대에 대한 원망과 맞바람을 피울 수 있다는 암시가 들어있다.
태양의 ‘나만 바라봐’(내가 바람 펴도 너는 절대 피지 마 Baby)는 내가 바람을 피워도 상대는 그래선 안 된다는 이기적인 노랫말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3 사회 비판 → 자기 만족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아이돌 그룹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으로 가사 내용이 개인적인 감정 묘사에서 벗어나 사회 비판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H.O.T.의 데뷔곡은 학교폭력을 다룬 ‘전사의 후예’였고 젝스키스도 한국 교육 현실을 비판한 ‘학원별곡’으로 데뷔했다. 이들은 10대 외에도 더 넓은 대중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시도도 했다. 1998년 발표된 H.O.T.의 ‘빛’(앞으로 열릴 당신의 날들을 환하게 비춰줄 수 있는 빛이 되고 싶어/이제 고개를 들어요 눈부신 빛을 바라봐요)은 실패를 딛고 희망과 구원을 이야기했다.
반면에 요즘 아이돌 가수의 노랫말은 상당수가 자기만족과 연애로 귀결된다. 자아도취의 대표적인 예가 원더걸스의 ‘소 핫’(섹시한 내 눈은 고소영/아름다운 내 다리는 좀 하지원/어쩌면 좋아 모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뿐만 아니라 사랑과 이별을 그리는 아이돌 가수의 가사는 영원한 사랑을 다짐했던 예전과 달리 뒤돌아보지 않고 냉소적인 게 특징이다. 이는 빅뱅의 ‘하루하루’에서 잘 나타나 있다. ‘네가 없인 단 하루도 못 살 것만 같았던 나/생각과는 다르게도 그럭저럭 혼자 잘 살아/돌아보지 말고 떠나가라/또 나를 찾지 말고 살아가라’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 가사 왜 자극적인가
“진득하게 못 듣는
생활변화 영향 커”
“이거 열아홉 살짜리들이 무슨 노래를 하는 거야?”
10월 19일 방영된 KBS2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 코너에서 왕비호가 2PM의 ‘10점 만점에 10점’과 원더걸스의 ‘소 핫’ 가사에 대해 던진 독설이다. 젊은 세대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는 아이돌 가수의 가사가 점점 대범해지고 노골적으로 변해가자 이에 대한 의견도 분분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씨는 “한마디로 미제너레이션(Me-Generation)의 반영으로 자기 본위적인 정서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며 “긍정적으로 보면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욕구의 표현이지만 대중음악이 개인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음악 관계자는 음악 환경의 변화를 원인으로 꼽았다. “음악을 진지하고 진득하게 듣는 시대는 지나갔다”며 “길거리에서 지나가거나 휴대전화 벨소리로 토막 난 음악을 듣는 환경의 변화가 음악을 비롯한 노랫말의 변화를 가져온 것일 뿐”이라는 것. 문화심리학자 이정우 씨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쿨한 척하고 이기적인 척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보이는 관계 미숙의 현상이 노랫말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은 작사가들의 작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에 시적인 표현을 중시했던 작법은 이제 옛날 얘기.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어울리는 반복적인 어구를 삽입하다 보니 이전보다 가사가 노래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고 입을 모은다. 작업 방식도 멜로디를 중심에 놓고 가사가 따라가던 방식이 아닌 노래 하나에 콘셉트를 설정해 신선하고 독특한 말을 붙인다는 것.
SG워너비의 ‘내 사람’, 다비치의 ‘사랑과 전쟁’ 등의 노랫말을 쓴 작사가 안영민 씨는 “줄거리 위주에서 솔직하고 귀에 남는 단어를 반복하다 보니 가사의 작법이 훨씬 쉬워진 것은 사실”이라며 “언어의 미학을 살리기보다 일상생활에 쓰이는 단어를 많이 쓰게 돼 예전보다 따라 부르기 쉬워진 반면 자극적으로 됐다”고 말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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