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史)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였지만,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광장’의 해였다고 할 수 있다.”(고 김현 문학평론가) 소설 ‘광장’ ‘화두’의 작가인 최인훈(72·사진) 서울예대 명예교수가 내년 등단 50주년을 앞두고 ‘최인훈 전집’(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4·19 기록한다는 소명감 컸지만
시대 변하면서 문학성 보강 필요
‘광장’ 아직도 바꿀 부분 더 있어”
최인훈 전집은 1976∼1979년 12권으로 처음 나온 적 있으며, 1990년대 초반에는 작가가 초판을 수정한 2차본이 나왔다. 세 번째인 이번 판본에는 소설 ‘화두’와 산문집 ‘길에 관한 명상’을 더했고, 문학평론가 김명인 박혜경 이광호 우찬제 씨의 해설을 더해 모두 15권으로 늘어났다.
최 교수는 19일 정오 서울 중구 태평로의 한 레스토랑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대단하지도 못한 성과를 남긴 이를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21일에는 후배 문인과 문학평론가들이 참여하는 심포지엄 ‘최인훈 문학 50년을 읽다’가 서울 마포구 동교동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린다.
―대표작 ‘광장’을 21세기에 다시 펴낸 소회가 남다르겠다.
“광장은 당대 시절이 담긴 글이다. 요즘 세대가 그 심정을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산 시대를 가장 심각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광장 초판을 냈던 마음이 한 번도 사그라진 적 없다. 젊은 나이에 역사적 사건을 대면하고 문학이라는 강력한 형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시대가 흘렀지만 그 나름 문학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새로 펴낼 때마다 글을 직접 손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쳤다. 글쓰기 관행을 생각하면 별스러운 일이겠지만, 후대에 남길 작품이라 생각하면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고 싶다. 인류 문화유산이란 측면에서도 계승 발전시키는 게 낫지 않은가. 광장도 이번 판에서 중요 부분이 수정됐다. 무엇이 바뀌었는지 알아내는 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이번 전집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예를 들어 광장은 4·19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 가을에 썼다. 너무 생생한 사건에 기초하다 보니 역사를 증언한다는 느낌에 숨 가빴다. 이제는 소설의 본령에 맞춰 문학성을 보강하고 싶었다. 이번 전집을 통해 역사의 현장에 대한 기록보단 예술로서의 소설로 독자들이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최 교수는 이번 전집에 대해 상당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특히 “광장은 완료형으로서의 역사를 기술하기보다는 역사의 고고학적 심층을 사유하고 ‘다른 역사’를 꿈꾸는 힘으로서의 정치적 상상력을 보여준다”(문학평론가 이광호 씨)를 비롯해 새로 추가된 평론가들의 평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과분하고 생광(生光)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소설 ‘광장’은 “꼭 바꿔야 할 대목이 한 군데 더 있는데 다음 기회를 봐서…”라고 갈무리했다.
―4·19혁명이 작가에게 가지는 의미가 큰 것 같다.
“개인적으로 현대 한국사 2대 대사건은 3·1운동과 4·19혁명이라 생각한다. 4·19혁명은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대원칙을 실현한 사건 아닌가. 난 6·25전쟁 통에 남한으로 건너왔다. 그래서인지 남한의 새로운 풍경이, 4·19혁명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광장’은 내 능력이나 재주로 쓴 게 아니다.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게 아닌가 싶다.”
―34년 뒤에 쓴 ‘화두’는 어떤가.
“앞서 이야기한 것이 한반도의 대사건이라면, 내 입장에서 소련의 붕괴는 세계사의 대드라마였다. 그런 사건 앞에서 또다시 펜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입장에서도 남북한 분리 등 다양한 영향을 끼쳤던 나라가 역사로 사라지지 않았나. 한동안 침묵의 시간을 가졌는데 다시 ‘화두’를 쓰게끔 바깥으로 내몬 계기였다.”
―등단 50주년을 맞아 자신의 문학을 평가해 달라.
“미술로 치면 인상파 같은 전위적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시대와 공유하며 문학의 ‘내적 현실’ ‘상상의 시공’을 만들어 냈다고 본다. 너무 시대적인 작가로만 보지 말고 문학성 자체를 봐 줬으면 좋겠다.”
―근황은 어떤가.
“2001년 정년퇴임한 뒤 시간이 많다. 지금 소설집 한 권은 낼 만한 분량의 원고가 있다. 좀 더 손보고 출간하겠지만 상당히 전위적이고 탐미적인, 순수예술 취향의 글들이다. 그동안 내 소설은 정치 역사적인 측면만 부각됐는데, 이번엔 맘 가는 대로 의식에 젖어 보았다. 다양한 시각과 언로가 보장된 시대 아닌가.”
―시대가 좋아졌다는 뜻인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말길이 넓어진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한쪽 주장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시대는 곤란하다. 다양한 의견이 공존해야 한다. 시끄러운 세상이라지만 이렇게 난분분하기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
―작가로 살아오며 후회스러운 일도 있나.
“작가로 오래 살아왔지만 대단한 세계관을 수립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건 별 상처가 안 된다. 허허. 어렵던 시절 부모가 고생해 (서울대 법대) 대학 등록금을 대 줬는데 제대로 졸업도 못한 게 가장 후회스럽다. 내 아이가 그랬다면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하니 더욱 죄송하다.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상’을 받은 걸 아버지(올해 96세)가 보신 게 터럭이나마 갚음이 됐으면 싶다.”
최 교수는 최근 눈에 이상이 생겨 조만간 백내장 수술을 받을 계획. 안부를 묻자 “별것 아닌 수술이다. 건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새 소설이 나오면 꼭 다시 보자”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길은 힘차고 유쾌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최인훈 연보
△1936년 함북 회령 출생 △1952년 서울대 법대 입학 △1959년 ‘자유문학’ 추천 등단 △1977∼2001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대표작 소설 ‘가면고’ ‘광장’(1960년) ‘구운몽’(1962년) ‘회색인’(1963년) ‘서유기’(1966년) ‘웃음소리’(1967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69년) ‘태풍’(1973년) ‘화두’(1994년),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년)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6년), 산문집 ‘길에 관한 명상’(1989년) △동인문학상(1966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년), 중앙문화대상 예술부문 장려상(1978년), 서울극평가그룹상(1979년), 이산문학상(1994년),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상(2004년) △2003년 ‘황해문화’에 단편 ‘바다의 편지’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