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37년 한(韓)나라 출신으로 진(秦)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정국(鄭國)이 한나라의 첩자로 밝혀지자 진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훗날 시황제로 등극한 영정(영政)이 외국 출신의 관료를 모두 추방하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린다. 이에 초(楚)나라 출신의 객경(客卿·높은 벼슬에 오른 외국인) 이사(李斯)가 상소를 올렸다.
“태산은 한 줌의 흙을 마다하지 않기에 점점 더 커지고, 황하는 작은 물줄기를 마다하지 않기에 점점 깊고 넓어지며, 명석한 군주는 사람을 배척하지 않기에 그 덕치가 널리 전해지는 것입니다.…많은 보물들은 진나라에서 나지 않고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진나라를 위해 힘을 바치고자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을 쫓아낸다면 적국을 돕는 것으로, 우리의 백성을 보내 적국의 힘을 키워 주는 것과 같습니다.”
‘간축객소(諫逐客疏)’라는 제목의 이 상소를 읽은 왕은 ‘축객령’을 철회했다.
중국 역사에서 신하가 황제에게 보여주는 문서이자 황제와의 의사소통 수단이 상소 또는 주절(奏折)이다. 상소는 그것을 쓴 사람이 높은 자리로 영전할 수도, 영영 자취를 감출 수도 있는 도박과 같은 것이었기에 역대 관료들은 한 자 한 자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책은 중국 역대 관료 15명의 대표적인 상소와 그에 대한 해설을 담은 것이다.
송나라 때 왕안석(王安石)이 신종(神宗)에게 올린 상소는 황제가 원하는 개혁안이었다. 영종에 이어 등극한 신종이 정치개혁 방안을 묻자 왕안석은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관리들이 돈을 쓰는 규정을 강화하고 탐관오리를 엄벌하며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그는 재정이 엉망이고 백성들이 곤궁한데도 태평성대가 100년간 이어진 것은 하늘이 도와서일 뿐이라고 간언했다.
통치자를 정면으로 비판한 상소도 있었다. 명나라 때 청백리 해서(海瑞)가 가정제(嘉靖帝)에게 올린 상소가 대표적이다.
가정제는 격노해 그를 옥에 가뒀지만 사형에 처하지는 않았다.
상소는 꼭 심각한 내용을 담은 것만은 아니다. 청나라 때 강희제(康熙帝)의 총애를 받은 신하 이광지(李光地)는 ‘병세를 알리오니 온천욕을 다녀올 수 있게끔 윤허해 달라’는 제목의 상소를 올렸다.
“건강한 몸으로 폐하를 뵐 수 있도록 2, 3주 온천에 다녀올 수 있게끔 윤허해 달라”는 상소를 읽은 강희제는 충분히 쉬다가 오라는 답신을 보냈다.
제갈량의 ‘전출사표(前出師表)’와 구양수의 ‘붕당론(朋黨論)’ 등 18개의 상소를 별도의 해설 없이 부록으로 실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