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프리랜서 요리사 레이먼 김(33) 씨는 자신을 “파스타 등 지중해풍 요리 전문가”라고 소개했지만 ‘액세서리 왕’ 같았다.
눈 위에는 ‘레이번’ 선글라스, 검지와 약지엔 굵은 반지, 12년 전부터 길렀다는 턱수염과 뾰족한 갈색 부츠까지….
그가 스타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4년 전.
캐나다 유학 시절 그는 백인 요리사들 틈에서 튀고 싶었다.
반지만 20개나 모았다. 요리사들에게 금기로 여겨지는 매니큐어도, 후각이 다칠까봐 다들 꺼리는 향수도 그에겐 문제되지 않았다.
왁스로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요리모자도 쓰지 않았다. ‘날티 난다’는 비판도 받지만 레이먼 김 씨는
관련 업계에서 인정받는 요리사로 꼽힌다.
그는 “요리사의 이미지가 그 식당의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요리사의 본분은 요리?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게 전부라면 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다. 멋이 더해진 맛의 시대다.
요리는 기본, 빛나는 외모까지 겸비한 요리사들은 이제 구석진 주방에 머물지 않는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청담동, 마포구 홍익대 앞 등에 이른바
‘오픈키친(공개형 주방)’ 형태의 레스토랑이 많아지면서 훈남 요리사들이 각광받고 있다. 맛 못지않게 자신의 스타일과 개성을 부단히 가꾸는 요리사들.
동네의 아이콘에서 시대의 트렌드에 선 이들의 멋 가꾸기 비결을 들어봤다.》
● 훈남 요리사들의 반란
서울 강남역 앞 시푸드 레스토랑 ‘마키노차야’의 ‘핫 파트’ 수석요리사 정구관(29) 씨는 “뽀얀 피부 덕분에 특히 아줌마 고객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이스라엘 화장품 브랜드 ‘아하바’의 스킨과 영양크림을 비롯해 ‘SL’의 아이크림 등 총 10가지나 되는 여성용 화장품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르고 있다.
10년 전 해산물을 튀기다 얼굴이 기름에 찌든 것을 발견한 그는 더 늦기 전에 피부관리를 하기로 했고 화장품 판매업을 하는 어머니와 여자친구로부터 여성용 화장품을 추천받았다.
● 화술 교육까지…
훈남 요리사가 되는데는 나이도 문제되지 않는다.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일식당 ‘스시조’의 한석원(45) 수석요리사는 일본 빈티지 패션 마니아다. 그는 일본 패션 아이템 쇼핑을 위해 올해만 6번이나 도쿄(東京)행 비행기를 탔다. 일할 때는 물론 흰 가운을 입지만 주머니에 주황색 장갑을 꽂거나 빨간색 머플러를 하는 등 ‘포인트 색’으로 패션감각을 뽐낸다.
한 씨는 “맛 못지않게 음식의 색 배합도 중요하다”며 “그런 감각을 키우는 데 패션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웨스틴조선호텔은 최근 디자이너 서정기 씨가 디자인한 주방복을 요리사들에게 지급했다. 또 고객 응대나 메뉴 소개법 등 특별 화술(話術) 교육까지 했다. 이 호텔 관계자는 “이미지 관리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전형 과정에서도 외적인 이미지가 당락에 점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 시대의 트렌드가 된 훈남 요리사?
최근 개봉한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는 아리따운 파티시에 민선우(김재욱)와 재벌 2세 김진혁(주지훈) 등을 앞세워 개봉 첫 주 50만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에서는 늘씬한 남자 모델 4명의 레스토랑 창업 프로그램 ‘졸리갹송(Jolis Garcons)’을 방영하고 있다.
이원훈 한국조리사중앙회 실장은 “과거엔 음식이 끼니를 때우는 수단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요리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가 됐다”고 했다. 폐쇄적이었던 주방 문화가 ‘오픈 키친’으로 대표되는 개방 문화로 바뀌며 조리과정, 실내장식 등 모든 것이 즐길거리가 됐다는 설명.
여기에 주방장들이 가게를 차리는 ‘셰프 레스토랑’이 늘어난 것도 한몫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덮밥집 ‘nodabowl’의 요리사 겸 사장인 김노다(33) 씨는 “요리사가 지배인 겸 사장을 겸하면서 음식점이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 현장처럼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겉모습만 강조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2003년 대영제국훈장을 받은 제이미 올리버나 호주 출신의 커티스 스톤 등 스타 요리사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데에는 외모 이전에 탄탄한 실력이 뒷받침됐다는 지적이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훈남 요리사 붐은 ‘요리’라는 기호를 통해 세련되고 예쁜 이미지를 즐기는 일종의 판타지 문화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