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인간은 왜 ‘얼렁뚱땅 진화’를 택했나

  • 입력 2008년 11월 29일 03시 04분


◇클루지-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개리 마커스 지음·최호영 옮김/312쪽·1만3800원·갤리온

《일단 궁금증부터 풀자.

클루지(kluge)가 뭔가.

사전에 따르면

‘고물이지만 애착이 가는 컴퓨터’

혹은 ‘서투른 또는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을 뜻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지만,

놀라울 만큼 효과적인 해결책.”

이상적이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땐

적절한 방식을 클루지라 부른다. 》

매순간 생존 위협받던 시절

목숨 구할 빠른 방법 찾아와

저자는 스물세 살(1993년)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뇌 과학·인지과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개리 마커스(사진)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빈 서판’(書板)을 집필한 세계적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MIT 교수의 제자인 이 젊은 천재는 줄곧 ‘생각의 역사’를 탐구해 왔다. 결론은 이렇다. “인간의 진화는 클루지다. 마음은 주먹구구식으로 진화해 왔다.”

쉽게 생각해 보자. 직립 보행하는 인간에게 하나의 척추는 형편없는 진화의 산물이다. 척추가 서너 개쯤 돼서 교차 버팀목으로 몸을 분산 지탱했다면 수많은 허리 통증과 디스크는 없었을 게다. 이렇게 불편하게 진화한 이유는 간단하다. 척추 하나가 적합했던 네 발 짐승에서 인간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나마 아예 일어서지 않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저자는 이런 육체 진화의 클루지가 그대로 인간의 생각과 마음에도 적용된다고 봤다.

이 논점에 따르면 인간의 ‘고귀한 이성’은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 책에 소개된 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96% 무해한 음료수’와 ‘4% 유해한 음료수’ 중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할까. 대부분의 사람은 96% 무해 쪽으로 기울었다. 똑같은 음료를 두고서, 단지 무해라는 어휘가 주는 안정감로 끌리는 게 인간이 자랑하는 ‘합리적 사고’다. 이는 생존에 위협받으며 안전을 지향했던 초기 인류 시절의 사고방식 위에 지금의 판단 체계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기억력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이 불분명해지는 건 왜일까. 너무 많이 기억하거나 나쁜 기억을 간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아서란 낭만적 합리화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좋지 않은 옛일만 지워진다는 보장도, 정확한 기억이 불필요하단 증거가 없으니까. 다시 초기 인류를 떠올려보자. 순간순간 생존을 염려하던 시대, 깊은 사고보단 순간 반응이 목숨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즉 “인간의 기억은 정확성보다 속도가 우선이었다”. 더 빨리 꺼낼 수 있는 최근 기억이 또렷한 건 이런 생각 진화의 클루지가 원인이었다.

“이런 ‘진화의 관성’이 생기는 까닭은 새로운 유전자가 이전 유전자들과 조화롭게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방식으로 진화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은 당장 이로운 유전자들을 선호하고 장기적으로 더 나을지도 모를 대안들을 폐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오늘 사용한 편법이 내일 문제가 되더라도, 지금 당장 제품을 팔아야만 하는 경영자의 처지와도 비슷하다.”

‘클루지’는 신선하다. 인간, 범위를 좁혀 생각의 결점을 과감히 들여다본다. 이를 진화론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책은 흔치 않다. 다윈에게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인간의 정신 활동을 가능하게 한 생물적인 토대를 살펴보는 일은 행복한 경험이다.

“인간이 진화해 온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솔직히 들여다볼 때,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고귀한 마음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그렇지 않은가. 단점마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원제 ‘Kluge’(2008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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