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이든 나라든 욕심이 큰 짐”

  • 입력 2008년 12월 3일 02시 58분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새벽 예불을 직접 하는 원명 스님은 “평상심을 잃지 말고 자기를 지키면 삶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양산=김갑식 기자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새벽 예불을 직접 하는 원명 스님은 “평상심을 잃지 말고 자기를 지키면 삶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양산=김갑식 기자
53인의 고승 ‘릴레이 법회’26일까지 53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통도사의 화엄산림법회. 사진 제공 통도사
53인의 고승 ‘릴레이 법회’26일까지 53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통도사의 화엄산림법회. 사진 제공 통도사
■ ‘화엄산림법회’ 주최 통도사 방장 원명 스님

“부모 자식 모두 버리고 집을 떠나왔어. 그런데 어떻게 사는지가 왜 궁금해?”

선지식(善知識) 53인을 초청해 화엄경을 주제로 열리는 ‘화엄산림법회’가 한창인 지난달 27일 경남 양산시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인 원명(圓明·71) 스님을 만났다.

하지만 스님은 대뜸 “‘중 놀이’가 특별할 게 있나. 세끼 밥 먹고 기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라면서 기자를 만나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불보사찰 통도사는 영축총림으로 불린다. 총림은 선원 율원 강원을 모두 갖춰야 하며 영축총림은 국내 5대 총림 중 하나다. 방장은 총림을 대표하는 큰어른이자 불법(佛法)의 상징.

스님은 침묵을 지키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는 대목에 이르자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크게 따로 할 말이 있겠나. 중은 다른 욕심 없이 중노릇 잘하면 되고, 저마다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면 큰 어려움이 없지. 마음속에 한 짐 들어 있는 욕심만 버린다면 가정과 나라 모두가 편안해지지.”

그러면서 스님은 손수 쓴 ‘서기만당(瑞氣滿堂·상서로운 기운이 방에 가득하다)’이라는 글을 건네면서 “올해는 나라살림도 어렵고 모든 것이 힘들었던 한 해”라며 “2009년에는 이 글대로 모든 것이 잘 풀리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현대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으로 불리는 경봉(1892∼1982) 스님의 맏상좌로 경봉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30년 가깝게 시봉했다. 1952년 출가한 뒤 군 복무와 짧은 나들이를 빼곤 산문(山門)을 벗어난 적이 없는 수행승이다.

스승에 얽힌 에피소드가 화제에 오르자 스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극락암에 머물던 노장께서는 누가 찾아오면 꼭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디로 왔느냐’고 묻곤 했지. 대부분 아무 말도 못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두 팔을 쫙 벌리며 껄껄껄 웃었어.”(원명 스님)

“화두에 대한 답이 제대로 된 건가요?”(기자)

“그런데 노장께서는 ‘너 소리 지르느라 애썼다’고 화답했지.(웃음) 마음의 경계(境界)를 넘어서면 뭐라 답해도 정답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뭐라 해도 틀린 답이지.”

“지금 바로 노장께서 방장 스님께 같은 화두를 던진다면 뭐라 하시겠습니까?”(기자)

“(웃음) 아직 멀었지. 그래서 매일 매일 닦아내고 있어.”(스님)

통도사는 조계종 종정을 지낸 월하 스님이 2003년 입적한 뒤 여러 사정으로 방장을 추대하지 못하다 지난해 3월 원명 스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다음 날 오전 경봉 스님이 주석하던 극락암을 거쳐 스승이 입적한 뒤 원명 스님이 머물던 비로암에 올랐다. 원명 스님이 주석하던 ‘소림굴(少林窟)’이라고 쓰인 작은 방의 댓돌에는 스님의 흰 고무신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산중 대중이 방장실에 머물라니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다”던 스님의 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1920년대 시작된 화엄산림법회는 매년 20여만 명이 참여하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대중법회다. 지난달 4일 시작된 이 법회에는 원명 스님을 비롯해 종범(승가대학장) 설정(수덕사 수좌) 무비(전 승가대학원 원장) 원산(전 교육원 원장) 스님, 티베트 불교의 링 린포체가 법사로 참여했고 26일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법문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은 “원효 스님 말씀처럼 어려운 일을 행하는 분이 부처님이고 우리네 어버이처럼 기꺼이 즐거움을 접을 줄 아는 분이 성인”이라며 “53일간의 화엄산림법회를 통해 부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양산=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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