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서양근세철학의 선구자 이마누엘 칸트와 대승불교의 대표적 철학자인 4세기 인도의 세친(世親·바수반두)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주관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세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칸트는 이성이 가상(假象)의 경험적 세계를 분별하도록 하는 보편적인 ‘초월적 의식’이 있다고 봤지요. 세친도 수행을 통해 눈에 보이는 가상의 세계를 걷어내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심층의 의식이 있다고 봤습니다.”
13일 서울 중구 장충동 동국대 90주년기념문화관에서는 한국칸트학회(회장 최인숙) 주최로 ‘칸트 철학과 불교 철학의 소통’이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린다. 이번 대회에서는 이화여대 한자경(49·철학) 교수가 6명의 발표자 가운데 첫 번째로 ‘경험세계의 가상성(假象性): 칸트와 세친의 비교’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칸트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동국대에서 다시 불교철학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동서양 철학의 소통을 모색해온 학자. 7일 눈발이 흩날리는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한 교수를 만났다.
논문 주제와 관련해 왜 칸트와 세친이냐고 물었다.
“두 학자는 1400년의 시간적 차이와 서양-동양이라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데 서로 통하는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객관적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가상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 마음, 즉 초월적 의식이 있다는 것이지요. 다만 칸트가 초월적 의식을 순수한 형식으로 본 반면 세친은 형식이자 내용인 것으로 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관 세계관에서의 가상성은 그가 철학자의 길을 택한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대학 때 평생 철학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끊임없이 스스로 던져온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줄 학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대세계에 널리 퍼져 있듯이 물질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인간의 정신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면 인간 개인은 그 물질세계 속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반면 제가 칸트와 불교에서 주목하는 것은 가상세계를 구성해내는 활동 존재인 초월적 자아가 있다는 것이지요.”
한 교수가 독일과 한국에서 2개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 스토리는 이러했다. 그는 “현대사회의 대부분을 만들어낸 것이 서양근대정신이기에 서양철학을 먼저 공부했고 귀국한 뒤 대학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불교철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고 했다. 독일에 갈 때부터 ‘나는 한국인이니 반드시 동양철학, 한국철학도 함께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인간 존재에 대한 서양철학의 답변만으로 만족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1988년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 대구 계명대 교수로 임용된 그는 이후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2001년 9월 이화여대로 옮겼다.
그는 이 시대 철학의 위기에 대해 “학문의 위기가 아니라 해당 학과와 대학의 위기인 측면이 있다”며 “진짜 위기는 인간의 주체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물리적 환경적으로만 규정되는 인간으로 이해하려는 학계와 사회의 흐름”이라고 말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