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이면 많은 사람이 그해의 운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는 토정비결. 주역을 기본으로 삼아 쉽게 운수를 볼 수 있도록 만든 토정비결이 알려진 것과 달리 이지함(1517∼1578)의 저작이 아니라는 내용을 담은 책이 나왔다.
신병주(사진)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토정 이지함 평전’(글항아리)에서 토정비결이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 등을 고려할 때 이지함이 쓴 책이 아니라 누군가 그의 이름을 가탁(假託·빌려서 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 근거는 이렇다. 우선 이지함이 세상을 떠나고 100여 년 뒤인 숙종 때 그의 고손자(高孫子·손자의 손자) 이정익이 토정의 유고를 모아 간행한 책인 토정유고에 토정비결에 대한 내용이 없다. 당시에 토정비결이 유행했다면 반드시 토정유고에 포함됐을 것이라는 게 신 교수의 설명이다.
저자는 조선후기 세시 풍속에 대한 책들에도 토정비결에 관한 내용이 없다고 말한다. 정조 때 홍석모가 조선후기 풍속 전반을 상세히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월 풍속으로 새해 신수를 보는 오행점(五行占)은 포함돼 있지만 토정비결은 없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 유득공이 서울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오행점과 윷점 등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만 토정비결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
신 교수는 후대의 누군가가 점술과 관상비기(觀象秘記)에 능했고 서민적인 인물로 알려진 이지함을 토정비결 저자로 내세운 것으로 본다. 고려 말과 조선 초 이름난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의 7대손이었지만 스스로 상업에 종사하고 거지들과도 어울릴 정도로 민간에 친숙한 인물이었던 그의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19세기 이후 토정비결과 같이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책에 ‘토정’이라는 브랜드가 붙여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지함이 올렸던 상소문과 사료 등을 통해 그가 민간의 현실을 체험하며 실용적 학문을 추구한 북학사상의 원류였다고 말한다. 농업 중심 사회였던 16세기, 백성이 잘살게 하려면 상업이나 수공업을 발달시켜야 하고 국제무역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의 사상이 18세기 후대 실학자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 “이름 빌려서 사용” 근거 3가지
1. 후손이 쓴 ‘토정유고’에 언급 안돼
2. 조선후기 세시풍속 책에도 누락
3. 19C 이후 ‘토정브랜드’ 붙여 유행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