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베풀었다고요? 훨씬 많이 받았죠”

  • 입력 2008년 12월 18일 02시 59분


푸른 눈의 젊은 사제는 이제 백발의 노신부가 됐다. 50여 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젤라 스타니슬라오 신부는 “언제나 넘치는 사랑으로 보답해준 한국 신자들과 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대구=김갑식  기자
푸른 눈의 젊은 사제는 이제 백발의 노신부가 됐다. 50여 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젤라 스타니슬라오 신부는 “언제나 넘치는 사랑으로 보답해준 한국 신자들과 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대구=김갑식 기자
한국선교 53년만에 귀국하는 ‘길 신부’ 길젤라 스타니슬라오 신부

남고 싶지만 주변에 짐 안되려 돌아가는 것

노인 공경하는 한국인 사고방식 아름다워

1955년 인천항에 25세의 프랑스 신부가 도착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파견된 길젤라 스타니슬라오 신부였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6·25전쟁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낯선 땅을 밟았다. 그로부터 53년간 한국에서 ‘길 신부’로 살아왔다. 파리외방전교회 규정에 따라 2009년 1월 귀국하는 그를 15일 대구 중구 남산동 대구대교구청 사제관에서 만났다.

―길 신부라는 호칭을 좋아하십니까.

“언제부터인가 길 신부가 됐어요. 길(吉)은 운이 좋다는 의미가 있어 좋은 성이라고 하더군요(웃음).”

―꼭 귀국해야 됩니까.

“하느님의 명에 따라 한국 사람들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곳 상황은 지금 괜찮아요.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면 안 되죠. 프랑스로 돌아가 은퇴한 신부님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당시 선교사들이 일본과 월남(베트남), 한국으로 많이 파견됐는데 전 한국에 가고 싶었습니다. 한국은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있고 부모님이 폴란드 출신 이민자라는 인연도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에 당한 것처럼 폴란드 역시 독일과 옛 소련 사이에 끼여 국토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모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반세기 넘는 한국 생활은 그를 한국인으로 만들었다. ‘일천구백오십오년’이라며 기억을 더듬거나 베트남을 꼭 월남이라고 표현할 때는 시골 할아버지를 연상시킨다.

―대구대교구의 마지막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입니다.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해 더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증거죠. 요즘에는 한국인 신부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많이 나가고 있어 큰 보람을 느낍니다.”

―한국을 떠나 다른 곳에 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나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현지 사람들과 대화하려면 말뿐 아니라 그 나라의 풍습과 정신도 배워야 합니다. 한 나라를 제대로 아는 것도 벅찼어요. 한국은 나 같은 노인들이 살기 좋은 곳입니다.(웃음) 과거 같지는 않지만 노인을 공경하는 한국인 사고방식은 아름답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입니까.

“1950년대 충남 예산의 공소에서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던 때입니다. 가난했지만 음식을 함께 나누고 같이 자면서 하나가 됐습니다. 이제는 예순이 넘어 같이 늙어가는 당시 신자들이 가끔 안부 전화를 합니다. 1961년 예수성심시녀회 담당사제로 대구대교구와 인연을 맺어 성모자애원 등에서 고아와 장애인, 한센병 환자를 돌보게 됐습니다. 포항제철이 들어서기 전 포항도 참 좋았죠.”

―3일 송별 감사미사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내가 준 사랑보다 훨씬 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1961년인가 아버님의 임종 소식을 접했지만 갈 수 없었는데 신자들이 바자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어머니를 초청해줘 1년간 모시고 살았습니다.”

―곧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느님이 인간을 구해줄 아드님을 구세주로 보내신 날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가득한 사랑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몸은 떠나지만 언제나 한국 신자와 교회를 위해 기도할 겁니다.”

14세 때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한 소년은 이제 백발의 노신부가 됐다. 그는 인터뷰 중 눈시울이 붉히면서 하느님의 은혜로 한국을 만나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대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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