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얼굴없는 ‘몰래 산타’ 기쁨주러 고고씽

  • 입력 2008년 12월 19일 03시 00분


답례요? 그저 다른 이에게 선행 베풀어 주세요 ^^

이달 초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한 중고품 상점. 난방비를 낼 돈이 없어 중고 모포를 사러 온 주부 테레사 세틀스에게 큼지막한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한 사람이 다가왔다. 10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넨 그는 세틀스에게 간단한 당부를 남기고 사라졌다.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기만 하면 돼요.”

이런 ‘시크릿 산타(Secret Santa)’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세인트루이스에도,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에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도 시크릿 산타는 나타났다.

이들의 정체는 원조(元祖) 시크릿 산타인 래리 스튜어트(1948∼2007)의 추종자들. 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스튜어트는 26년간 130만 달러(약 17억6000만 원)를 불우 이웃에게 나눠준 자선 사업가였다.

그에게도 계기가 있었다. 1971년 연말 직장을 잃은 그는 무작정 식당에 들어가 허기를 달랜 뒤 지갑을 잃어버린 척했다. 이런 그를 지켜보던 주방장은 그에게 “지갑에서 흐른 돈”이라며 20달러를 건네줬다.

이후 그는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을 숨기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시크릿 산타로 활동했다. “사람들은 서로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그의 말이 알려진 뒤 현재 미국에는 시크릿 산타 공식 사이트 ‘시크릿 산타 월드’(www.secretsantaworld.net)를 중심으로 많은 시크릿 산타가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세밑 분위기는 어둡고 지갑은 얇디얇다. 그렇지만 토종 시크릿 산타들은 ‘미국산’ 못지않게 전국을 뛰어다니고 있다.

오늘도 자신을 숨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 ‘마니또’(비밀 친구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문화에 흠뻑 빠진 몰래 산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이 겨울이 더 추운 이들을 돌보는 비밀 산타…. 이들에겐 24시간이 부족하다.

● 마음 부자, 마니또 시크릿 산타

“주말에 MT 다녀와서 힘드시죠? 달콤한 쿠키 드시고 즐거운 한 주 보내세요!”

코오롱아이넷 경영지원본부의 20대 여직원 김모 씨는 매주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 같은 본부 회계팀으로 달려간다. 직접 준비한 달콤한 과자 두 봉지와 편지를 지퍼백에 넣어 정철호 차장의 자리에 몰래 놓는다.

유부남인 정 차장과, 그에게 베푸는 김 씨. 하지만 ‘므흣한’ 상상은 하지 마시라. 이들은 지금 마니또 게임 중이다. 단지 게임인데도 이렇게 열의를 보이는 데 대해 김 씨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에 나 자신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펀(Fun) 경영’의 하나로 시작된 코오롱아이넷의 마니또 이벤트는 올해 송년모임까지 바꿔놓았다. 이 회사 경영지원본부는 폭탄주가 난무하던 송년모임 대신 올해는 마니또 결과를 발표하며 그동안의 에피소드를 주고받을 예정이다. 이때서야 정 차장은 자신의 마니또가 김 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니또 이벤트를 기획한 한우준 ‘퍼니 팟(Funny Pot)’팀 과장은 “직접 편지를 쓰거나 종이 게시판에 마니또 자랑 글을 올리는 등 아날로그 방식으로 더 큰 감동을 주려 했다”고 말했다.

일대일이 아닌 회사 지정 ‘기쁨조’ 형태의 마니또도 있다. 홍보대행사 ‘피알 원’은 깨알처럼 작은 존재지만 사원들에게 웃음을 준다는 뜻으로 이달부터 ‘깨알 매니저’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깨알 매니저는 한 달간 전 직원을 대상으로 즐거운 이벤트를 펼쳐야 한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디자인=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힘들 때마다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격려 편지와 사탕

누군가 했더니… 어! 팀장님이었네?

‘몰래 산타’

첫 깨알 매니저로 선정돼 30여 명의 동료에게 손 편지와 장미꽃을 선물한 30대 직원 모 씨는 다음 주로 예정된 송년회를 손꼽아 기다린다. 자신의 신원을 공개한 뒤 가수 비의 ‘레이니즘’을 부르기 위해 퇴근 후 춤 연습에 여념이 없다. 그는 “동료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생각을 하니 힘든 줄도 모른다”고 했다.

마니또 문화는 ‘디지털 마니또’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온라인 마니또 동호회인 ‘마니또와 함께 하는 일상의 작은 행복’의 회원 수는 1700명이 넘는다. 10대가 많지만 4050 중년들도 적지 않다. 회원들은 익명 게시판을 통해 각자의 마니또에게 “사랑한다”, “보고 싶다”는 글을 남긴다. 월말에는 오프라인 모임도 가지며 5000원 이하의 작은 선물도 교환한다.

○ 내 직장 동료가 시크릿 산타?

“어머, 휴지에 불 붙었어 어떡해!”

13일 오후 서울 중구 필동 CJ 인재개발원. 건물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불꽃이 튄다. 산타클로스 차림을 한 97명의 예비 산타들은 ‘까르르’, ‘호호호’ 웃으며 비둘기 마술에 빠져들었다.

CJ 나눔재단 도너스(donors) 캠프의 ‘산타 학교’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 커플부터 강원도에서 아침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온 학생, 어학당에 다니는 인도인 등 구성도 다양했다.

이들의 임무는 27일까지 2인 1조로 시크릿 산타가 되어 전국의 공부방을 돌며 몰래 산타로 활동하는 것. 목적지는 최종 ‘지령’을 받아봐야 알 수 있다.

행사를 기획한 조정은 CJ 도너스 캠프 팀장은 “‘봉사=즐거운 놀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시크릿 산타 이벤트를 열었다”며 “어디에서 봉사활동을 할지,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모르는 상황 자체가 설렘이자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산타 지원서를 낸 김선경(29) LG이노텍 연구원은 “주5일 근무제 이후 주말에는 무작정 집에서 뒹굴었던 적이 많았는데 이웃에게 봉사하며 행복을 느끼는 게 피로를 푸는 좋은 방법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며 활짝 웃었다.

NHN은 직원 104명을 모아 ‘몰래 산타’ 이벤트를 편다. 각자 1만∼2만 원씩 모은 돈으로 선물을 사 전달하는 봉사활동으로, 목적지에 따라 시크릿 산타의 이름이 정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20명의 홀몸노인에게 선물을 보내는 ‘호호 산타’부터 50명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익살 산타’, 저소득 가정 8곳을 위한 ‘패밀리 산타’ 등.

‘몰래’ 움직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이들은 24일 밤 12시에 자신이 맡은 장소에 가 할머니, 할아버지, 어린이 등의 머리맡에 몰래 선물을 두고 올 예정이다.

○ 단체…기부천사 대신 시크릿 산타로

사회봉사단체에서도 올해는 시크릿 산타가 이슈다. 매년 말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는 ‘어린이 재단’은 올해 처음 시크릿 산타 개념을 도입해 ‘2008 산타 원정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도움받는 어린이가 누군지, 어떻게 돕는지도 모르는 채 무조건 산타가 되려는 159명의 신청을 받은 상태다.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여자친구와 6년째 크리스마스를 보내는데 올해는 우리만 즐거워하지 않고 불우한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김철순 씨·28)

“2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져 올해 체중이 5kg이나 빠질 정도로 슬펐지만 몰래 산타가 돼 봉사하면 그나마 뜻있게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유재영 씨·24)

일본인 유학생 스즈키 호슈(21·여·서강대 신문방송학) 씨의 계기는 더 흥미롭다. 그가 봉사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에 유학 오면서부터. “‘가나다’도 모르고 왔는데 처음 보는 분들이 한글을 가르쳐주고 공책도 복사해줘 어떻게든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봉사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스즈키 씨는 “한국어 발음이 아직 서툴러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핀잔도 받지만 시크릿 산타가 된다니 벌써부터 흥분된다”고 말했다.

시크릿 산타의 정성을 전달하는 ‘시크릿 루돌프’도 있다. 부산 택시 브랜드 ‘등대콜’ 소속 기사 20명이 그 주인공. 이들은 23일 자선단체로부터 받은 선물 500개를 부산지역 복지관 20곳에 전달할 예정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아예 산타복장으로 나타나 택시에 ‘루돌프’ 플래카드를 붙인 채 부산을 누빌 계획이다.

시크릿 루돌프 이벤트를 기획한 김동현 차장은 “봉사를 하다 보니 기사들 스스로 승객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다”고 전했다.

○ ‘놀이’가 된 시크릿 산타

시크릿 산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까닭은 뭘까.

‘굿네이버스’의 임경숙 팀장은 “지금은 좋은 일을 하면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보상심리가 무의미해진 시대”라며 “남몰래 봉사하는 행위 자체에 성취감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분위기는 1년 전 충남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 이후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시각이 있다. 전국 각지에서 100만 명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몰려들면서 봉사가 하나의 ‘놀이’가 됐다는 것이다.

온라인 봉사 커뮤니티에도 젊은층의 참여가 많아졌다. ‘누구를 돕자’는 식의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함께 좋은 일을 해보자’는 경쾌한 이미지로 거듭났다. 자영업자 박인성(31) 씨가 지난달 개설한 시크릿 산타 이벤트 동호회는 사설(私設) 카페인데도 오픈 10일 만에 2000명이 넘는 회원이 몰렸다.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창의적 봉사’ 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라며 “기존의 봉사활동이 시크릿 산타를 통해 일종의 ‘기획 봉사’ 형태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시크릿 산타 문화의 근원은 ‘내 마음의 치유’, ‘나를 다스리기’ 등 나 자신에게 있다고 풀이하는 이들도 있다. 마음속 공허함을 뜻이 맞는 이들끼리 봉사로 채우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시크릿 산타 봉사활동을 하려는 백기환(16·송현고 2) 군도 얼마 전 아버지가 음주 후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받은 충격을 벗어나려 산타가 되고자 한다. 백 군은 “시크릿 산타로 활동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슬픔과 충격을 딛고 내 마음을 치유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크릿 산타에 대해 ‘설익은 선행’이라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나치게 흥미에 초점을 맞춰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1회성, 기분전환용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인 선행문화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 동아일보 원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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