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글렌은 덕포의 한 신발공장에서 일하다가 프레스기계에 오른손을 다쳐 엄지와 검지, 중지가 잘리고 으깨져버렸다. 이식수술을 했지만 앞으로 물리치료를 계속 한다고 해도 손가락의 기능은 겨우 무엇을 집는 정도밖에 안될 것이다… ‘손 수술에 만족하니?’ ‘네, 만족합니다. 저는 참 운이 좋았어요.’ 글렌은 씩 웃어 보였다.”》
가난한 환자도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
지은이 최충언 씨는 외과의사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부산 송도의 달동네에 2006년 개업했다. 그의 병원은 환자에게 진료비를 거의 받지 않는다. 몇천 원이 부담스러워 병원을 찾지 못하는 이웃이 그의 환자이기 때문이다.
최 씨는 의대에 재학 중이던 1982년 3월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돼 옥에 갇혔다. 수감생활 중에 천주교 신자가 된 그는 평생 가난한 이웃을 위해 활동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3.3㎡ 남짓한 작은 공간에 갇힌 채 옷 한 벌, 밥 한 그릇, 세 가지 반찬에 의지하고 지낸 감옥생활에서 스스로 낮추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깨우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조건없이 치료해주는 의사로서 첫 터전은 부산 천마산 기슭의 구호병원이었다. 책의 첫 장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 자선병원에서 지은이가 8년 동안 외과 과장을 지내며 만난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구호병원은 돈이 없어 일반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노숙자가 많이 찾는다. 하지만 노숙자들의 냄새를 ‘가난의 향기’라 부르는 의사와 수녀들은 코를 막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두 번째 장은 지은이가 후배와 함께 남부민동에 작은 의원을 내면서 시작한다. 거기서 만난 환자 이웃들과의 경험담을 통해 최 씨는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돈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다가 환자 유인 행위로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단속을 당한 이야기는 의료봉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예외 없는 규칙이 없다”고 고집하는 보험공단 직원에게 병원이 있는 지역의 특수성을 설명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냥 월급쟁이 의사로 돌아갈까….’ 맥 빠진 고민에 휩싸였던 최 씨는 휴일 단속을 나온 보험공단 직원을 맞으러 병원으로 나간다.
최 씨는 의원 진료와 별도로 한 주에 두 번씩 구호병원에서 수술 봉사를 한다. 일요일 오후에는 무료진료소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돌본다.
이 책에는 ‘돈 못 버는 의사 남편’을 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담긴 글도 있다. 모처럼 쉬는 평일. 늘 말없이 속아주고 양보해 주는 아내와 영화관 나들이로 분위기를 잡아보려 하지만 3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를 나눠 먹는 것으로 데이트는 끝난다.
병원 앞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밤마다 여흥을 즐기는 송도해수욕장이 있다. 최 씨는 그곳의 불꽃놀이를 내려다보며 ‘내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이 어디선가 사람들이 서서히 죽어간다’고 기도한다.
“환자들이 뜸한 틈을 타 가만히 진료실 창밖을 바라봅니다. 배달할 신문을 들고 가파른 계단을 비틀거리며 오르는 벙어리 단골 환자 영대 씨, 폐지와 빈 상자를 주워 담으며 카트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위대하고 똑같이 초라합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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