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2년 워커힐호텔 준공

  • 입력 2008년 12월 26일 02시 57분


서울 교외 광나루에 세워진 이곳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주한 외교사절 등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열렸다.(1962년 12월)

이곳에서 4월 개관을 앞두고 예약신청을 접수했더니 첫 번째 손님은 서울에서 개최될 여호와의 증인 회의에 참석할 각국 대표 442명이었다.(1963년 1월)

육군교도소 복역수 연 1만8000명, 해군 기술요원 연 560명, 공군 기술요원 연 1065명, 교통부 건설부 기술자 수십 명, 관용 불도저가 이곳을 짓는 데 투입됐다.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도록 정부 부처와 군에 부당한 압력을 넣은 중앙정보부 전 차장보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1963년 4월)

밤이 되면 젊은 여성이 이곳에 몰려와 외국인에게 추파를 던졌다. ‘작업’이 성공하면 산속으로 들어가 말 그대로 ‘야합(野合)’을 했다. 경찰은 매음행위를 하던 양공주 23명을 연행했다.(1964년 8월)

국정감사에서 이곳의 관리가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해마다 3500여만 원의 막대한 적자를 냈는데 종업원 600명에게 매일 커피와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일반 소모품을 마음대로 쓰도록 방치했다고 한다.(1965년 11월)

교통부는 국제관광공사 산하인 이곳을 민영화하기로 결정했다. 관광공사는 직접적인 관광사업을 하지 않고 관광진흥 지도업무만을 맡게 됐다.(1968년 11월)

정부는 국내에 마땅한 휴양시설이 없어 일본으로 떠나는 주한미군을 잡아두려고 이곳을 지었다.

건설비 5억1700만 원과 내부 설비비 1억2600만 원을 들여 건물 35동 가운데 26동이 먼저 들어섰다. 대지 19만1000평으로 땅값은 1300만 원.

동아일보는 12월 26일 열린 준공식을 알리면서 ‘雄姿 나타낸 東洋最大의 享樂地’라고 표현했다. 조선일보는 ‘東洋屈指의 娛樂센터’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교통사고로 숨진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을 기념해 이름을 ‘워커힐’로 정했다. 주 건물은 워커(Walker)의 이니셜인 W자 모양이다.

1970년대의 남북 적십자회담 때 이곳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화려한 시설과 쇼를 보고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전형이라고 비난했다는 얘기가 있다.

선경그룹(현 SK그룹)은 이곳을 1972년 불하받았고 1978년 쉐라톤워커힐호텔로 이름을 바꿨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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