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 일본 헤이안 시대, 지역 토호의 모반에 쫓겨 산속으로 도망친 젊은 지방관 일가는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죽어간다. 단 하나 남은 혈육 다섯 살 먹은 아이는 굶어죽은 부모 곁에서 녹나무 열매를 빨다 지쳐 잠들고, 그렇게 죽은 아이의 입속에서 녹나무 씨앗이 싹을 틔운다. 아이의 정령이 깃든 나무는 관동지방의 한적한 시골마을 언덕에 우뚝 서 음산하리만큼 울창한 천 년 수령이 된다.
그 태생부터가 비극적이었던 녹나무는 인간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지는 않는다. 나무는 친구들에게 이지메를 당하고 나무에 목을 매달려는 중학생, 가난 때문에 유곽으로 팔려온 소녀, 자신이 죽인 부인을 어머니로 믿어 버리는 도적 등 인간 군상들에게 세상 근심 모두 떨쳐내고 어서 빨리 죽음의 세계로 오라는 듯 손짓한다. 하늘을 가리고 선 한 그루 거대한 녹나무 아래에선 이렇게 삶과 죽음의 드라마가 처연하게 펼쳐진다.
총 8편의 연작이 들어 있으며 각 편은 시대를 달리하는 과거와 현대의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는 방식으로 이어져 있다. 녹나무는 첫 단편 ‘맹아’에서 비극의 싹을 틔운 뒤, 울고 웃고 죽어가는 인간들을 지켜보며 천 년을 살다 최종 편 ‘낙지落枝’에서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줄기와 가지가 베이고 쓰러진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