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원수졌냐” 항의메일 곤욕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직업이 2개란 말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생업이고, 또 다른 직업은 바로 영화평론가란다. 그만큼 자기가 본 영화에 대해 비평하길 좋아하고, 남들의 평론에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많단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문사 영화기자도 그리 호락호락한 직업은 아니다.
일한답시고 대낮에 극장에서 영화 보면서 폼이나 잡는 직업처럼 보이지만, 기자가 쓴 프리뷰가 신문지면에 나가는 순간 그 자신의 내공과 시각적 깊이가 만천하에 까발려지고 말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문사 내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스쳐 지나가면서 “난 그 영화 재밌던데?”(“근데 넌 왜 그렇게 별로라고 썼냐. 너 혼자 잘난 체하냐? 네 팔뚝 굵다”의 함축적 표현) 혹은 “네가 쓴 기사 보고 영화 봤는데 영화 좀 그렇더라…”(“네 놈한테 배신당했다. 돈 아까워 죽는 줄 알았다. 이 사기꾼 같은 놈아”의 완곡한 표현) 하고 툭툭 던지는 얘길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콩알만 해지기 일쑤인 것이다.
올 한 해도 저물어 간다. 2008년 나의 뇌리에 박힌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① ‘비’ 떼 메일 사건=올해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칼럼은 영화 ‘스피드 레이서’로 미국 할리우드에 진출한 가수 출신 배우 비(정지훈)를 다룬 것이었다.
비의 과도한 연기와 영어발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내용. 칼럼이 나가고 50통이 넘는 항의메일을 받았다. 초중고교생들에게서 온 것으로 보이는 메일들은 대부분 “네가 무슨 비하고 철천지원수이기에 비를 씹느냐” “월드스타를 비난하는 넌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 “넌 비만큼 연기할 줄 알고 영어할 줄 아느냐”(이런 메일에는 “그럼 비는 나만큼 기사 쓸 줄 아느냐”고 반박하고 싶어진다) “너같이 뚱뚱하고 못생긴 놈일수록 열등감 때문에 잘생긴 남자배우를 욕하는 법이다” 같은 내용이었다.
물론 ‘월드스타’를 비판할 땐 그만한 각오가 서 있어야 한다. 하지만 50여 통의 메일 중 유일하게 긍정적인 제목을 가진 메일을 발견하는 순간, 난 ‘사막의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듯한 심정이었다. 메일의 제목은 ‘이승재 기자님, 기사 너무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호호호’였다. 기꺼운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본 나는 망연자실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라고 말할 줄 알았지? 이 변태 놈아. 넌 영혼의 정화가 필요한 놈이야.’
아! 진정 난 ‘영혼의 정화’가 필요한 자일까? 이때부터 나에게 매주 한 편씩 성경의 한 구절을 메일로 보내주는 독자도 생겨났다. 새해엔 더 착한 기자가 되어야겠다.
② 난 아직 젊다?=최근 개봉된 ‘트와일라잇’이란 영화를 보셨는지. 기존 뱀파이어 영화의 문법을 틴에이저 무비에다 뒤섞은 이 영화를 나는 극장 개봉 1주일 만에 보았다. 영화를 보러 가려는 나에게 후배 기자가 말했다. “선배,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느냐에 따라 신세대와 구세대로 엇갈린대요.”(후배) “오잉? 그게 뭔 말?”(나) “이 영화가 유치하게 느껴지면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거고요, 재미있게 느껴지면 젊은 거래요.”(후배)
약간의 떨림을 안고 드디어 ‘트와일라잇’을 보았다. 아, 할렐루야! 이 영화가 너무나 흥미롭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난 아직 젊다. 난 아직 어리다. 난 아직 뜨겁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