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신춘문예]중편소설 ‘헤이, Mr. 차페크!’

  • 입력 2009년 1월 1일 00시 11분


<요약>

어느 해 가을, 열두 살의 주인공 ‘나’는 군대에서 백일 휴가를 나왔던 여덟 살 많은 형을 배웅하기 위해 마을버스에 오른다. 형은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지만 내 앞에선 늘 실없는 장난만 하고 바보처럼 구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모습만 보여주는 사람이다. 나는 캐러멜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어른들, 특히 형이 담배나 태우면서 캐러멜을 맛없어 하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술과 여자밖에 모르는 망나니라 나는 그를 꼰대라고 부른다. 내게 있어 모든 아버지의 역할은 형이 지금까지 대신해 왔다. 형은 나에게 바보이면서, 아버지이면서, 밤 심부름 길에서 나약하고 쓸쓸해 보이는 긴 그림자의 형상이기도 하다.

형의 부탁으로 약국에서 멀미약을 사가지고 나오는 순간, 형은 아무런 말도 없이 버스를 타고 떠나버린다. 그리고 이틀 후, 형은 군 내무반에서 한밤중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국군병원에서 나는 형의 죽음을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형이 늘 사주고 내가 좋아하는 캐러멜을 허기진 듯 입에 계속 우겨넣으면서 슬픔을 달랠 뿐이다.

형이 죽은 다음부터 내 신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생긴다. 형의 유품을 태우던 중 형이 살아생전 좋아하던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표지에서 삽화로 그려진 차페크가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난다. 이뿐만 아니라, 그 속에 수록된 36편의 단편 속 주인공들이 차례로 나타나 형이 죽은 뒤에 나만의 외로운 공간이 된 골방을 휘젓고 다닌다.

나는 그 수많은 캐릭터 중 클라라란 인물에 가장 애착을 갖고 있다. 클라라는 ‘푸른 국화’라는 단편의 주인공인데 글도 모를뿐더러 귀머거리에 말도 못하고 아무에게나 달려들어 헤프게 웃으며 키스를 퍼붓는 여자다. 그러나 클라라는 ‘출입금지’라고 쓰인 팻말의 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악덕 주인이 사는 기찻길 옆 집 정원에서 세상에 없다고 알려진 푸른 국화를 얻는 인물이다. 클라라는 그러니까 남이 없는 눈을 가진 여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자주 책을 읽어 현실로 클라라를 불러낸다. 클라라는 형이 남긴 흔적들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책상 속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가 혼자 웅크리고 있기도 한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최대한 긍정하려고 애를 쓴다.

새엄마와 정신병원에 다녀온 뒤 나는 3일간 크게 앓고 그 후로 차페크와 클라라를 만나지 못한다. 그들과 관계된 일들이 결국 나만의 환각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끝까지 인정할 수 없다. 방학 때마다 정신병이 있다고 부담스러워하는 무심한 아버지에 의해 친척들에게 떠넘겨지기도 한다. 친척들은 나를 측은해하긴 하지만 역시 아버지와 똑같은 심정이다. 나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에 차차 익숙해진다. 그리고 중학생이 된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나는 어엿한 숙녀로 성장한 클라라를 만나게 된다. 클라라는 끝내 나를 따라오진 않지만 외로움으로 점철된 내 어린 날을 잠시나마 위로해주고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형과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날처럼 새로운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도시로 가서 이십 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스무 살의 나는 삼류 작가인 삼촌의 집에 얹혀살면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거치고 직업학교에서 적성과 무관한 기술을 배우기도 하면서 취직을 준비한다. 전자기술을 배우면서도 그 시간에 엉뚱하게 소설책만 읽는 나는 학교 사람들의 비난과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다. 어렵게 자격증을 취득하지만, 기술을 배운 것이나 자격증과는 무관한 직장을 갖게 된다. 야구공 만드는 공장이다. 처음엔 그 일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거기서 일하는 사십 대의 ‘석씨’라는 남자를 만난 다음부터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리고 곧 삼촌의 집을 나와 회사에서 가까운 달동네로 이사를 간다. 그 달동네는 희한하게도 달이 굉장히 크게 보인다. 달이 한 번 뜨면 바로 눈앞에 열기구가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곳 사람들은 그런 달을 일상적으로 여기고 있다.

나와 같은 달동네에 살고 있는 석씨는 집에선 부인에게 매만 맞고 회사에선 말도 잘 없고 웃지도 않는 인물이지만, 초등학생들과 어울려 폐교에서 야구 시합을 할 때면 세상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 석씨라는 어린아이 같은 인물을 통해 세상을 견뎌가는 법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에게서 팔 년 전 죽은 형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어느 겨울, 나는 눈이 무척이나 많이 내리던 날에 아내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 밤 골목에서 우는 석씨를 보고 그를 위로한다. 그리고 애처로운 그의 그림자를 보고 차페크를 떠올린다. 그러나 석씨는 그날 밤 홀연히 사라진다. 나는 며칠 크게 앓게 되고 회사 사람들이 모두 차페크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변해버린 환각을 경험한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생이 된다. 시간이 흘러 달동네의 철거 소식을 듣고 찾아온 나는 옛일을 추억하며 폐교로 다시 흘러든다. 거기서 석씨가 예전에 숨겨둔 야구 장비들을 찾아내고 혼자 밤에 야구놀이를 하면서 마음의 쓸쓸함을 달랜다. 그리고 폐교를 떠나려고 하기 직전, 검은 그림자의 형상으로 나타난 차페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차페크를, 힘겹지만 영원히 떠나보내려 한다. 차페크는 스스로의 고독한 삶을 오롯이 긍정하려는 내게 강렬한 향기의 푸른 국화를 선사하고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이정민

■ 당선소감

오직 한가지 마음으로 달려가겠다

뚜렷하지도 않은, 동두천의 어두컴컴한 새벽길이 떠오른다. 그 새벽 불현듯 눈을 떴을 때 외가에 간 어머니가 그리웠다. 잠든 아버지와 동생 몰래 집을 빠져나와 길을 달렸다. 몇 번인가 길모퉁이 담벼락에 기대 숨을 골랐다. 그 길을 달려 마침내 찾은 어머니의 품. 지금 가장 원하는 일에 대한 열망이, 그날 오로지 한 가지 마음으로 새벽길을 달려가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고 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소설 속 상상의 자유로움을 일깨워주신 박기동 선생님, 마음의 사표로서 새기는 김혜순 선생님, 문학에 대한 동경 속에 서 계신 이광호 선생님, 소설 쓰는 자의 끈기를 당부하신 한강 선생님, 글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주신 장석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가진 것은 치기뿐인 내가 오늘까지 열의를 밀고 오게 된 건 온전히 박성원 선생님 덕이다.

동생 정욱이와 안성호 선배님, 이성원 군과 유림이, 가영 누나, 그리고 현아 선배, 혜영 누나, 태윤 재우 승희 건영 민정 지혜 소아 민경 혜진이를 비롯한 문예창작과 사람들, 조언을 아끼지 않은 영애 누나와 내 소설을 성심성의껏 읽어준 동기 현정이에게 고마움을 전하겠다. 친구인 임호연과 전광호, 그리고 7월 세상을 떠난 규대에게도…. 길은 여전히 하나뿐인 것 같다. 좋은 작가로, 좋은 소설로 보답하겠다.

△1980년 경기 동두천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예술대 전공심화과정(문예창작전공) 재학 중

■ 심사평

내적 고통 표현하는 능력 탁월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내용과 스타일이 다양하고 목소리에 개성이 있었다. 몇 편은 이야기의 현실 환기 효과가 의심스러웠고, 몇 편은 시선을 끌려는 과도한 포즈가 불편했다. 길게 논의한 작품은 ‘디스코 팡팡’과 ‘허물’, ‘헤이, Mr. 차페크!’였다.

죽음의 그림자에 붙잡힌 영혼들의 비이성적 행동을 통해 존재의 불안을 그려 보인 컬트 무비풍 소설 ‘디스코 팡팡’은 인물들의 이상심리에 대한 공감을 불러내는 데 성공하지 못해 소설 속 사건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허물’은 미용사를 주인공으로 아름다움과 욕망,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라는 문제를 꽤 집요하게 다뤘다. 낯선 소재에 대한 취재도 성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주요 인물이 만들어내는 갈등이 평면적이고 진부한 데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서술의 지루함도 아쉬움을 주었다.

‘헤이, Mr. 차페크!’는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형의 사라짐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세계(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에 입문하는 10대 소년의 성장 과정을 다른 텍스트 속 세계의 인물들에 의지해서 보여 주는 소설이다. 할 말이 많은 듯 절제되지 않은 문장이 걸리지만, 세계에 대한 자세가 진지하고 고통을 내면화해서 표현하는 능력이 상당하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이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어렵지 않게 동의했다.

조남현 문학평론가·이승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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