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파 이념논리에 대한제국 역사 매몰”

  • 입력 2009년 1월 2일 02시 59분


■ 내달 정년퇴임하는 서울대 이태진 교수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연구실은 벽을 돌아가며 책장을 설치한 것도 모자라 연구실 가운데도 천장까지 닿는 책장이 3개나 있었다. 책장은 역사책으로 빼곡했다.

“1977년 처음 교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책이 한쪽 벽도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선후배 동료 제자 연구자들이 펴낸 책들이 늘어난 덕분에 책장도 이렇게 늘었어요. 31년 사이 국사학의 연구 성과가 그만큼 풍성해진 거겠죠.”

대한제국사 연구를 개척하며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새롭게 조명했고 을사조약과 한일강제합방의 불법성 연구의 권위자인 이 교수가 2월 정년퇴임한다. 이 교수를 지난해 12월 29일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가 30여 년 동안 펴낸 논문은 170편이고, 저서는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2005년), ‘한국병합의 불법성 연구’(2003년), ‘고종시대의 재조명’(2000년) 등 16권에 달한다. 이 교수는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 외규장각 환수 운동에 불을 지핀 주인공이기도 하다. 2006∼2008년에는 서울대 인문대학장을 맡아 최고경영자(CEO)와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가하는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을 개설해 반향을 일으켰다.

이 교수는 처음에는 조선시대 유교사회사를 전공했다. 이 교수가 대학에서 공부하던 1960년대는 유교가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유교 망국론’이 파다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유교 망국론은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는 논리를 퍼뜨리기 위한 일제 식민주의의 잔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988∼1992년 서울대 중앙도서관 규장각도서관리실 실장을 맡은 때가 연구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규장각 도서는 정리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이 교수는 규장각 도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가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상세한 전말을 밝혀냈다.

특히 규장각에는 고종 시대의 문서가 가철된 상태로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시대가 바뀌면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합니다만 우리는 대한제국의 역사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구한말 근대 한국 역사를 이해할 중요한 사료가 천대받은 탓에 일제가 왜곡한 대한제국의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죠.”

규장각에는 법령과 칙령, 의정부와 궁내부(왕실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아) 등의 주요 문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을사조약과 한일강제합방 관련 문서가 위조된 사실이 차례로 드러났다. 이후 이 교수는 2001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 ‘한국병합의 역사적 국제법적 재검토’ 등 한일강제합방의 불법성 연구를 주도했다.

2001년 국제학술회의 이후 한일강제합방의 불법성 연구에 공감하는 일본 학자들과 함께한 7년여에 걸친 연구 성과가 최근 일본에서 ‘한일병합과 현대’로 출간됐고 올해 3월 같은 제목의 한국어판(태학사)이 출간될 예정이다.

“처음에는 이 책에 한일강제합방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일본 학자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합법성의 근거가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작업에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불법성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근거 앞에서는 일본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는 “2010년 한일강제합방 100주년을 대비하는 연구도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할 사료를 가능한 한 많이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일본 학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규장각 도서 연구는 그에게 대한제국의 재조명이라는 평생의 과제를 안겼다. 1990년대 초반 영국에서 대한제국이 일본 도쿄보다 3년 이른 1899년 전차를 부설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자료를 찾아낸 것도 계기였다.

“근대사 연구자들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부터 한국사를 연구한 탓에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왕조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사를 통찰하면 조선은 그리 쉽게 몰락할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사료에서도 대한제국이 근대화 노력을 기울였다는 증거가 여기저기서 발견되죠.”

이 교수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비하한 일제 논리에 여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며 “우리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좌우 이념적 극단으로 나뉘어 있다”고 지적했다. “좌파의 구한말 연구는 민족운동사에 편향돼 계급사관의 관점이 있을 뿐 당시 왕조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우파가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제국, 조선의 역사를 결과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각하는 데 식민사관이 개입돼 좌파 사학에 비난의 빌미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대한제국은 좌우파 역사학이 이념적 논리에 매몰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역사 중 하나”라며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은 역사학의 중도(中道)를 추구하는 내 신념의 발현”이라고 강조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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