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위기

  • 입력 2009년 1월 7일 18시 26분


아래아 한글은 2000년대 들어 지속적인 점유율 하락을 감내해야 했다.
아래아 한글은 2000년대 들어 지속적인 점유율 하락을 감내해야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 표준인 OOXML을 앞세워 온라인 환경의 문서 작성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연합]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 표준인 OOXML을 앞세워 온라인 환경의 문서 작성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연합]

"휴가 중에 공무원이 급하다고 메일을 보냈는데, 열어보니 첨부파일이 'hwp'면 미칩니다. -_-;"(한 누리꾼, ID:북풍)

세계 소프트웨어 업계를 놀라게 했던 대한민국의 신화 하나가 저물어 가는 것일까?

한국은 그동안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피스가 아닌 국산 문서작성 소프트웨어가 시장을 장악한, 세계 유일한 국가로 분류돼왔다. 하지만 이것도 2000년 초반까지의 얘기일 뿐 아래아한글의 추락은 갈수록 급해지고 있다. 일찍이 사업을 접은 삼성의 문서작성기 '훈민정음' 꼴이 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

'한글과컴퓨터'(대표 김수진)는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최대 히트작인 '한글 97'로 시장점유율 70%를 달성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경영난을 겪으며 제대로 된 투자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결국 MS인수설 등 홍역을 치루며 경영권이 혼란스럽던 끝에 2006년 조사에서는 시장점유율이 17%로 떨어졌다. 현재는 시장점유율 10%를 조금 넘기는 수준일 것이라는 게 업계의 추정. 이 마저도 정부기관의 압도적인 '아래아한글 우선 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수치라는 분석이다.

최근엔 공공기관들의 아래아한글 사랑도 그 한계에 달했다는 신호들이 포착되고 있다.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특허청이다.

특허청은 지난달 17일 한국MS와 손잡고 오픈XML 기반의 글로벌 특허문서작성 프로그램을 새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전까지는 한글97 기반의 전자문서 작성기 케이에디터(K-Editor)가 활용돼 왔다.

● "아래아한글 호환성 약해" 특허청, MS 선택

특허청의 이 같은 결정은 한글과컴퓨터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결정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그만큼 공공기관이 소프트웨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얘기다. 일례로 아래아한글이 국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배경에는 국방부에서 배출하는 군 행정병들이 모두 아래아한글을 썼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을 정도. 그만큼 특허청의 아래아한글 포기 결정이 가져올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특허문서작성기'란 특허를 받기 위해 특허청에 제출하는 각종문서 작성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쉽게 말해 이제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래아한글로 작성해 특허청에 제출하면 충분했다. 정부기관들이 중심이 돼서 국산 소프트웨어 살리기 운동을 해왔던 셈이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 7대 특허 강국으로 불릴 정도여서 최근 특허 업무가 국제화 됐을 뿐만 아니라 업무환경 또한 급속하게 온라인으로 이동했다. 그간 아래아한글은 우리나라 문서를 편리하고 예쁘게 편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폐쇄적인 구조가 약점으로 지적돼 왔다. 21세기 문서 양식의 대명사인 웹(Web)과의 호환성이 약할 뿐만 아니라, 내부 검색이 불가능한 구조가 아래아한글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

특허청 관계자는 "새 특허문서작성기는 표준 문서 포맷인 오픈XML 기반으로 제작되며, 'MS 워드'를 편집기로 활용할 예정"이라며 "이를 기반으로 작성된 문서는 오픈XML을 지원하는 문서 양식끼리 손쉽게 호환되며 미국 일본 등 선진 5개국 특허청에서 추진 중인 공통출원서식과도 호환된다"고 설명했다. 즉 글로벌 시대에는 '독자적 문서작성기'란 컨셉트가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 같은 특허청의 결정에 저항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방형 표준문서 포맷에는 IBM, 썬마이크로시스템즈, 구글 등 오피스 SW업체들이 모여 만든 표준화 단체 오아시스(OASIS)의 ODF(Open Document Format)포맷과 MS진영의 OOXML(Open Office XML)포맷이 서로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형국.

때문에 누리꾼들은 "특허청이 OASIS의 ODF도, 널리 쓰이는 PDF도 아닌 MS의 OOXML을 택했다는 것은 앞으로 특허청과 작업하려면 값비싼 MS Office 2007로 업그레이드 하라는 것인가"라고 질타했다.

하지만 이미 컴퓨터 환경의 97% 이상이 MS제품인 현실에서 어쩔 수 없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특허청의 결정에 대해 MS는 조금 여유로운 입장이다. 이미 일부 정부기관을 제외하곤 기업과 개인 사용자들은 MS 오피스로 이동했다는 것이 자신감의 배경이다.

MS의 한 관계자는 "아래아한글이 도스(Dos)시대에는 위력적이었지만 윈도우 버전으로 넘어가면서 처음에 지녔던 혼(mojo)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모바일이라는 차세대 시장이 남긴 했지만 아래아한글이 예전의 위세를 찾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 전통의 아래아한글, 시장 지켜낼까?

한글과컴퓨터 역시 새로 시판할 2009년 버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개방형 오피스 포맷을 적용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MS의 OOXML로 간다면 현재의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철저하게 MS의 종속적인 기업으로 존재해야 할 숙명을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ODF방식을 택하자니 문서작성기 시장에서 밀려날 우려가 높아진 것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다양한 표현력이 생명인 ¤글 문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간소화된 표준인 ODF보다는 보다 정교한 표현이 가능한 OOXML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한글과컴퓨터는 2009년 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늦어도 1월 안에 뚜렷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한글과컴퓨터 관계자는 "2007년 478억 원의 매출을 달성해 총 5년 연속 매출 신장 및 흑자경영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모바일 등 다양한 기기에 맞는 것은 물론 개방형 오피스 포맷을 적용한 한컴오피스를 새로 개발해 전통의 아래아한글 시장을 지켜나갈 것이다"고 강조했다.

현재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2000년 아래아한글을 인수하려고 했던 MS를 막아낸 것처럼 '제2의 아래아한글 8.15 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개방형 표준문서 포맷이란?

전자문서에 특별한 의미나 정보를 추가하는 태그 등을 부착하기 위해 고안된 XML(확장성표기언어) 기반으로 하여 문서를 제작하기 위해 제안된 표준 문서양식이다. XML은 확장성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 데이터를 편집하거나 검색할 수 있게 지원하는 양식이다. 때문에 XML의 표준이 정해져 이를 기반으로 문서가 작성되면 문서 간에 손쉽게 호환되며, 이용자들은 하나의 문서양식에서 작성한 내용을 다른 문서 양식으로 쉽게 변환·저장할 수 있게 된다. 현재 ODF양식과 OOXML양식 두 가지가 국제표준화기구(ISO)로부터 표준 인정을 받았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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