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심신을 바로잡아 활기찬 시작을 하고 싶다.
이럴 땐 여행이 제격이다.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이란 책에서 ‘여행은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기묘하게 잇는 생각의 산파’라고도 했다.
하지만 불황으로 값비싼 해외여행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실은 그동안 우리가 큰 관심을 갖지 않아서 그렇지 해외여행보다 훨씬 더 깊은 감명을 줄 수 있는 국내 여행지가 구석구석 많다.
동아일보는 새해 가볼 만한 국내 여행지 세 곳을 소개한다. 인천, 부산, 충북 제천∼강원 정선을 다녀온 세 명의 기자가 각기 소개하는 세 가지 빛깔의 새해 여행!
● 연인 또는 가족과 함께하는 서해안 여행
새해 들어 인천 용유도와 차이나타운을 당일치기로 다녀왔습니다.
서해안을 간절히 원했던 건 아니지만 서울에서 1시간 여 거리라는 건 분명 매력이었어요.
마침 연초에 휴가를 얻은 남편과 함께 나섰습니다. 올해가 ‘인천 방문의 해’여서 인천관광공사 홈페이지(into.or.kr)의 여행정보가 큰 도움이 됐어요. 승용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알뜰여행 콘셉트로 여행 스케줄을 짰습니다.
▽겨울 바닷가에서 찾는 소소한 행복=오전 8시 40분. 집을 나서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탔더니 1시간 만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정거장에 내리자마자 운 좋게도 용유도 을왕리해수욕장에 가는 306번 버스(1000원)를 바로 탈 수 있었죠. 하얏트인천호텔 등 현대식 건물을 지나자 고즈넉한 섬마을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어요. 무의도와 실미도를 갈 수 있는 거잠포 입구, 옛날 옛적 한 여인이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목숨을 끊었다는 기암괴석인 ‘선녀바위’…. 20분 만에 버스는 을왕리해수욕장 바로 앞에 정차했습니다.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에서 불과 1시간여 만에 이렇게 아름다운 겨울바다를 마주할 수 있다니…. 모래사장에서 예쁜 조개껍데기를 주워 담으니 소소한 행복감이 밀려 왔습니다.
몸도 녹이고 이른 점심식사도 할 겸 해변가에 있는 조개구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닷가 전망이 좋은 ‘노을과 바다’(032-746-3316)란 식당에서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를 시켰는데, 양이 꽤 푸짐했어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썰물로 인해 좀 전보다 모래사장이 드넓었어요. 갯벌보다 단단해 마치 바다 물길을 가르는 기분이었죠. 점심 무렵이 되자 꼬마 아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선 젊은 아빠, 중년의 연인들이 꽤 늘었습니다.
▽이국적 정취의 차이나타운=당초 계획은 영종도 선착장으로 가 배를 타고 월미도로 향하는 것이었죠. 선착장 행 버스를 오래 기다려야 해서 다른 버스 운전사에게 “택시는 없느냐”고 했더니, “여긴 섬이에요. 택시가 없어요”라더군요. 이때 깨달았어요. ‘아, 난 그동안 너무 빨리빨리 살았던 건 아닐까’라고요. 승용차가 드물던 시절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공중전화 앞에서 줄을 서던 ‘슬로 라이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잖아요. 매서운 추위에 갑자기 몸살기가 있어 하는 수 없이 배를 포기하고 인천역행 306번 버스를 탔습니다.
글·사진=인천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부산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제천·정선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기자 3인의 ‘3색 여행’
다대포 매혹의 바다에 싱글남 ‘싱글’
아우라지 꼬마열차에 싱글녀 ‘벙글’
오후 2시. 인천역에 도착하니 바로 건너편에 중국 요리집과 중국 상품점이 가득한 차이나타운이 있습니다. 길거리 노점에서 비즈 장식이 예쁘게 박힌 1만 원짜리 중국 플랫슈즈, 2000원짜리 서양 앤티크풍 브로치를 사고 ‘중국제과’(032-773-8800)에서 중국 전통 공갈빵(1500원)도 간식으로 사 먹으니, 중국을 여행하는 기분이었죠.
한 개에 500원인 중국 포천 쿠키를 사서 올해 제 행운이 무엇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어 보니, ‘당신의 얼굴에 환한 웃음을 새겨줄 소식이 있겠다’는 내용이 나왔어요. 그 문구에 힘을 얻어 길거리 작은 슈퍼에 들어가 1000원짜리 로또복권도 두 장 샀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토요일 로또 당첨 결과를 보니, 웬걸요. 12개 숫자 중 당첨 숫자와 일치하는 것은 단 한 개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첨 결과를 기다리기까지 온갖 즐거운 상상을 했으니 그리 아깝지는 않네요.
차이나타운 뒤편으로는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펼쳐집니다. 유명한 맥아더 장군 동상 말고도 돌계단 난간과 벤치에 새겨진 예쁜 그림 등이 마구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했습니다.
▽1500원으로 즐기는 시티투어의 매력=오후 4시. 인천역 앞에서 1500원짜리 인천시티투어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정류소마다 관광정보 안내 멘트가 나와 초행길 여행에 도움이 됐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영어 안내 멘트도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들었고요. 이 버스는 특히 인천항 구석구석을 돌기 때문에 거대한 물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천연해수 워터파크인 ‘인스파월드’(032-885-6776)에 내려 찜질방과 사우나(6000원)를 즐기고 나온 시간은 오후 6시40분. 오후 7시 마지막 셔틀버스를 타고 동인천역에 도착해 용산행 급행열차를 타니 40분 만에 서울 용산역 도착! 익숙한 장소를 벗어난 ‘슬로 라이프’, 소소한 것들의 즐거움,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멋진 하루’였습니다. 삶에 지쳤거나, 새해 새로운 충전을 필요로 하는 당신에게 이 짧은 여행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 서른 살 싱글 남자의 부산 여행 일기
‘새로 고침’. 이것은 꽉 막혔던 화면을 사라지게 하는 인터넷 만병통치약. 이런 약이 나에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9년 새해. 시무식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야근, 결혼 좀 하라는 친구들의 참견, 덧없는 소개팅.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런 괴로운 생활에 적응해버린 서른 살 싱글 남자인 나 자신이었다.
모든 걸 뒤로한 채 무작정 떠났다. 누군가 기다리지도 않는 부산. 서울에서 400km가 넘을 정도의 물리적 거리. 하지만 KTX로 2시간 40분만 달리면 해운대 백사장이 보인다니, 그 심적 거리는 서울 근교처럼 가깝다.
‘무적의 솔로부대’나 ‘3040 솔로클럽’, ‘솔로가 더 멋지다’ 같은 유명 온라인 싱글 동호회에서는 이미 부산이 ‘외로운 도시 남자들의 여행지’로 소개되고 있다. 동해 서해와 달리 KTX 한 번으로 갈 수 있다는 간편함, 산사(山寺)처럼 적적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즐거움 때문이다.
▽사춘기 소년처럼=무작정 떠나야 제 맛인 부산. 으레 해운대 겨울바다로 갈 법도 하지만 혼자서 찾기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찾아간 곳은 바로 ‘고독한 바다’로 알려진 부산 사하구 다대포 해수욕장.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만큼 부산 지하철 1호선 북쪽 끝인 신평역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조용히 각오를 다지고 싶을 땐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하얀 갈대부터 울퉁불퉁한 암석들까지 ‘날것’의 이 바다는 잘 다듬어진 해운대와 광안리에서 볼 수 없는 매력이 있어 솔로 남자들의 아지트로 여겨진다. 들쑥날쑥한 파도를 보다 보니 어느새 주먹은 불끈, 두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서울에서 안고 왔던 번민과 고뇌가 마음속 깊이 가라앉고 새로운 각오만이 솟아오를 뿐이다.
▽경쾌한 예술인처럼=다음 코스는 중구 남포동 국제시장.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11번 버스를 타고 도착한 이곳에는 구수한 부산 아줌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내 먹자골목의 ‘꽃’이라 불리는 길거리 충무김밥. 골목은 이미 발 딛을 틈 없이 빽빽하다. 오징어무침과 무무침, 그리고 아줌마들의 구수한 인심을 반찬 삼아 후딱 해치우면 옆 틈으로 중고음반점 ‘먹통’(051-246-3753)이 보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적판, 해외 수입 LP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기에 부산 음악 애호가들의 집결 장소이자 해외 관광객들에게도 명소로 통한다. 3층 LP룸에는 특유의 쾌쾌한 레코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복잡한 마음은 이미 딴 세상 얘기다.
먹통을 나와 골목 끝까지 걸어가면 보수동 헌책방들이 나온다. 부산항으로 들어온 미소녀 표지의 일본 잡지들, 특히 1980년대 일본의 아이돌 스타였던 마쓰다 세이코(松田聖子)와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가 표지모델인 잡지는 반가움을 넘어 신기함 그 자체다.
▽정겨운 소시민처럼=부산역 앞에서 29번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안창마을. 경사진 비탈길 위에 있는 이 달동네는 최근 부산의 명소로 떠오른 곳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미술추진위원회(아트인시티) 주최로 2007년부터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새총 쏘는 아이들’부터 ‘담쟁이넝쿨’ 등 달동네 입구를 수놓은 벽화들은 마냥 즐겁다.
마지막 여정으로 선택한 곳은 수영구 광안리 앞 ‘아쿠아팰리스 온천’(051-756-0202).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광안대교의 야경 덕분에 몸과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숙박은 해운대 앞 ‘씨클라우드 호텔’(051-933-1000), ‘나비호텔’(051-747-8484) 등 10만 원 초반대의 저렴한 호텔들 중 한 곳을 골라야 하는데…. 앗, 얼마 전 1박에 5만5000원(올해 3월 10일까지는 특별 할인 요금 3만5000원)인 부산역 앞 일본 비즈니스호텔 체인점 ‘토요코 인’(051-466-1045)도 생겼다니, 솔로 만세! 바다 만세! 부산 만세!
○ 20대 여자들의 산골 열차 우정 여행
“아, 여행 가고 싶다….”
지난해 말 10년 지기 고교 동창과 만난 자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말이 연말 같지 않고, 새해가 새해 같지 않은 이 ‘우울한 시절’, 우리에게는 새로운 한 해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가다듬을 수 있는 여행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정선선 기차 여행’이었다.
▽오랜 친구와 떠나는 산골 기차 여행=하루에 두 번 충북 제천시와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사이를 오가는 정선선은 국내에서 기차 여행의 진수를 가장 잘 느낄 수 있기로 손꼽히는 노선이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강원지역 산골마을들을 천천히 달리는데, 승객이 많지 않아 열차 객차도 달랑 2칸이 전부. 귀엽게도 그 별명은 ‘꼬마열차’다.
정선선 기차는 서울 청량리역에서 강릉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제천이나 쌍룡, 영월, 예미, 증산역 등 5개 역에서 갈아탈 수 있다.
2일 오전 7시. 친구와 만나 1호선 지하철을 타고 강릉행 열차가 출발하는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그동안 사다만 놓고 읽지 못했던 소설책 두 권과 카메라, 좋아하는 음악을 가득 담은 MP3플레이어, 새해의 생각을 정리할 다이어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여유롭게 즐기는 ‘느림의 미학’=오전 9시 청량리역을 출발한 강릉행 열차는 2시간 반가량을 달려 제천역에 도착했다. 정선선 열차로 갈아타기까지는 2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제천역 밖으로 나오니 바로 눈앞에 제천 시내 풍경이 펼쳐졌다.
제천역 앞은 평소에는 다른 지방 도시 역전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제천 풍물장터’가 들어서는 매달 3, 8, 13, 18, 23, 28일에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넘치는 시골 장터로 변신한다.
실제로 서울로 돌아오던 3일 들른 제천 장터에는 1940, 50년대에나 볼 수 있었을 법한 각종 골동품부터 옛 농기구, 심지어 무당 방울에 이르기까지 이색 소품들이 다양했다. 눈깔사탕, 즉석 생과자 같은 추억의 먹을거리뿐 아니라 노인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약장수의 구성진 입담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오후 2시 5분. 마침내 기차 기관차 뒤로 2칸의 객차가 달린 ‘짜리몽땅’한 정선선 꼬마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섰다. 140여 개의 좌석에 채 10명이 안 되는 사람들을 싣고 출발한 이 꼬마열차의 통유리 창으로는 건조한 겨울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메마른 갈색의 겨울 산은 마치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보는 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얼마 전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산골마을을 지날 때면 설경의 아름다움도 누릴 수 있었다. 훈훈한 난방을 한 한적한 기차를 타고 즐기는 책과 음악, 겨울 풍경은 그 자체가 최고의 여행이었다.
▽정선선 기차 여행 2배로 즐기기=정선선 기차 여행을 하려면 코레일 홈페이지(www.korail.com)나 콜센터(1544-7788)를 통해 미리 기차표를 예매하는 것이 좋다. 하루에 단 두 차례만 운행하기 때문에 환승 시간을 잘 계산해 강릉행 열차표를 끊는 것이 관건. 청량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기차 요금은 왕복 기준 1인당 약 4만 원 선이다.
1박을 할 시간 여유가 있다면 아우라지역 근처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정선선 열차로 돌아오는 코스도 추천한다. 휴대전화 불빛을 조명 삼아 걸어야 할 만큼 칠흑 같은 어둠의 산골 밤하늘에서 아름다운 눈썹달과 수십 개의 별빛이 빛나는 장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우라지역에서는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 구절리역까지 7.2km의 기찻길을 달리는 ‘레일 바이크’(www.korailtours.com)도 즐길 수 있다.
펜션 등 숙소 정보는 정선군 관광문화포털(www.ariaritour.com·정선군 관광문화과 033-560-2363)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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