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인 영화 속 건축의 세계
(박제균 앵커) 건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막연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일상 속 문화 콘텐츠 곳곳에서 건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상품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죠.
(김현수 앵커) 최근 국내 개봉했던 영화 '더 폴(Fall):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세계 건축의 잔칫상 같은 영화였다고 합니다. 문화부 영화팀의 손택균 기자가 함께 이 영화 속의 건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손 기자, '더 폴'은 어떤 영화인가요?
(손택균) 예. '더 폴(Fall):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이야기가 매력적인 영화는 아닙니다.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헐거운 스토리. 인물-대사-사건은 떡 벌어지게 차려놓은 풍경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 장치일 뿐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인도 감독 '타셈 싱'은 TV CF 감독 출신입니다. 1991년 록 그룹 R.E.M.의 'Losing My Religion'으로 MTV 최우수 뮤직비디오 상을 받았던 재간꾼이죠.
그는 광고 촬영을 위해 17년 동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인도, 터키, 체코 등 모두 스물여덟 개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더 폴'에는 싱 감독이 점 찍어뒀던 이들 나라의 멋진 자연과 도시, 건축물이 낱낱이 담겨 있습니다.
(박 앵커) 특히 눈여겨보고 기억해둘만한 건축물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손) 영화 초반. 여섯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인디언'의 아름다운 아내가 악당 오디어스에게 납치돼 특이한 장소에 감금당합니다. 이곳은 인도 라자스탄 주 자이푸르의 '잔타르 만타르' 천문대. '잔타르 만타르'는 산스크리트 어로 '마법 장치'라는 뜻입니다.
천문 관측과 일기 예보에 쓰인 계단 모양 석조 건축물이 줄줄이 늘어선 이곳은 1734년 완공됐습니다. 하나의 별을 향하도록 세워진 열 네 개의 계단. 가장 큰 계단의 높이는 27m입니다. 계단 구조물의 그림자로 낮 동안의 시간을 가늠하고, 일식과 계절풍의 변화도 예측했다고 합니다.
'더 폴'에서 이 천문대는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계단만 한없이 이어지는 절망의 미로'로 소개됩니다. 인디언의 아내는 이 끝없는 오르내림의 절망에서 탈출하기 위해, 결국 허공으로 몸을 던지죠.
(김 앵커) 싱 감독이 어떤 유명한 그림에서 이 장면의 이미지를 따 왔다고 하던데요.
(손) 예. 싱 감독은 "잔타르 만타르 천문대 장면에 모리츠 코르넬리우스 에셔의 판화 이미지를 입혔다"고 했습니다. 네덜란드 화가 에셔는 '무한 공간'이라는 초현실적 주제로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찰스 다윈'의 파트너인 '월레스.' 이 원숭이가 총에 맞아 죽는 계단식 건축물도 무한 공간과 닮았습니다. 이곳은 자이푸르에서 남서쪽으로 5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조드푸르 인근 '아브하네리' 마을의 '찬드 바오리' 저수지입니다.
9세기에 만들어진 이 저수지는 약 3미터 높이의 사방 벽면을 3500여 개의 계단으로 가득 채운 구조물입니다.
(박 앵커) 아무래도 인도 출신 감독이다 보니 주로 인도의 인상적인 건축물을 주요 장면 배경으로 삼아서 이야기를 전개했나 보네요.
(손) 예. 영화 끝 부분에서 오디어스의 성이 있는 장소로 나오는 '푸른 도시'도 조드푸르입니다. 1459년 세워진 '메랑가르' 성채를 둘러싼 구 시가지 건물 대부분이 인디고블루 색깔로 칠해져 있습니다. 이 도시가 처음 생겼을 때 이주해 온 브라만들이 숭배한 '시바 신'의 상징이 파란색이었다고 하네요.
이탈리아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 로마의 콜로세움, 터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사원,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중국 만리장성. 세계의 위대한 건축물들이 짤막한 장면의 배경으로 그냥 스쳐지나갑니다.
하지만 모든 장면에는 최선의 각도에서 피사체를 담아내려 한 싱 삼독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전 세계 방방곡곡을 오가는 초대형 로케이션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싱 감독은 자기 재산까지 제작비로 털어냈습니다.
(김 앵커) 몇 가지 중요한 건축물에 대해서 미리 알아두면 영화를 보면서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겠네요.
(손)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언젠가 꼭 한번 가볼만한 놀라운 건축물이 이 지구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얼기설기한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지루해질 수 있으니까, DVD로 이 영화를 만나는 분은 아예 볼륨을 없애버리고 화면만 보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엔야, 곤잘로 루발카바, 빌 더글러스의 몽환적 음악을 추천합니다. 자기만의 특별한 배경음악을 입혀보는, 색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박 앵커) 손 기자,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