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청담동 ‘바티-리을’은 허풍 없는 근린생활시설이다. 흔히 ‘상가’라 부르는 근린생활시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과장되기 쉽다. 외형적으로 튀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다가 주변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거나, 임대 효율에 집착하다가 대지 경계선에 꽉 맞춘 뚱뚱한 흉물이 올려지곤 한다. 바티-리을 건축주인 김상교(53·사업) 씨는 혼자 잘난 척하거나 이기적이지 않은, 근린(近隣)과 소통하는 건축물을 원했다. 설계자인 김동진(41) 로디자인 도시환경건축연구소장이 제시한 해답은 ‘ㄱ과 ㄴ이 만나 ㄹ을 짓는 건축’. 바티(b^ati)는 ‘짓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 바티르(b^atir)의 과거분사다.》
하늘 향해 열린 ㄴ과 땅에 화답하는 ㄱ 맞물린듯
층마다 테라스 조성 ‘소통의 철학’ ㄹ모양 형상화
경사지인 동쪽 외벽은 ㄴ자 노출콘크리트가 공중에 매달린 ㄱ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이다. 김 소장은 “하늘을 향해 열린 ㄴ과 땅에 화답하는 ㄱ이 맞물리게 했다”고 말했다. 북쪽 입면은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커다란 ㄹ자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콘크리트 조형이 강조하는 것은 인상적 외형이 아니라 그로 인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맺음이다. 출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로를 외면한 채 각자의 층으로 숨어드는 건물이 되지 않게 한 것. 핵심 장치는 북동쪽 모퉁이의 콘크리트 계단이다.
“보통 엘리베이터 옆에 최소한의 공간을 활용해서 비상용 계단실을 만들어 놓지요. 바티-리을은 주 진입로 쪽으로 널찍하게 열어놓은 계단으로 방문객과 사용자를 끌어들입니다.”(김 소장)
일직선으로 4층까지 쭉 뻗어 올라간 계단은 층마다 작은 테라스와 연결된다. 허겁지겁 뛰어오르는 출근길. 커피 한 잔 들고 테라스에 나선 다른 층 이웃과 슬쩍 눈인사라도 하라는 배려다. 동남쪽 모퉁이에 감춰놓은 엘리베이터는 짐이 많은 사람의 통로다.
이 계단은 언제나 외부에 개방된다. 동네 사람 누구나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반쯤 열리고 반쯤 닫아둔 공공의 공간. 많은 근린생활시설이 무시하고 있는 주택가 건물의 기본기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층마다 외벽을 조금씩 엇갈려 쌓았기 때문에 건물 아래에서 올려다본 입면은 울퉁불퉁하다. 칼로 자른 듯 평평한 외벽에 일직선을 죽죽 긋듯 창문을 뚫어놓은 보통 상가 건물과 대조적이다. 밖을 내다보는 시선의 방향도 층층이 여러 갈래로 엇갈린다.
김 소장은 “남의 것과 똑같은 공간을 원하는 심리는 천편일률 올려 세운 아파트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개성적 디자인을 가진 환경을 원하는 분위기가 최근 들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19년 살던 주택을 허문 건축주 김 씨는 익숙하지 않은 디자인에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임대효율을 잃지 않으면서 이웃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다는 건축가의 제안을 꼼꼼히 살펴본 후 그대로 따르기로 결정했다. 김 씨는 부인 김연희(53) 씨와 이 건물 5, 6층에 살고 있다.
“오랫동안 남의 건물 사무실을 빌려서 사업을 하다 보니, 건물주보다 사용자의 편의를 배려한 건물을 만들고 싶었어요. 6층 테라스를 안쪽으로 깊이 감춰달라고 했습니다. 널어놓은 빨래가 보여서 누가 살고 있음을 드러내면 입주자에게 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지상 6층 지하 1층에 연면적은 742.88m². 2007년 5월 설계를 시작해 2008년 10월 완공했으며 건축비는 10억 원이 들었다. 바티-리을은 지난해 10월 제31회 한국건축가협회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