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범은 파도 소리를 듣자마자,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머물렀던 작은 섬을 떠올렸다. 지금은 섬 이름조차 잊었지만, 하룻밤 묵은 여관방 달력에 적힌 낙서만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갯내가 클럽을 감쌌다. 바닷물이 무대 밖으로 흘러넘쳐 손님들 허리까지 출렁거렸다. 가랑이로 색색가지 물고기들이 지나갔고 둥근 해파리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석범은 물살을 가르며 댄스홀을 도는 상어 지느러미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제법!"
거대한 연꽃봉오리가 무대로 떠왔다. 꽃봉오리가 벌어지자 반 벌거숭이 흑인 무희가 양팔을 비비 꼬며 등장했다. 메두사처럼 산발한 머리카락이 이마와 눈썹을 가렸다. 비트가 더 빨라졌다.
쏴아아!
흰 포말을 일으키며 휘감기는 파도로 무희가 뛰어올랐다.
"얏호!"
"최고, 최고!"
무대 바로 아래에 선 꺽다리와 뚱보가 술병을 높이 들고 쿵쿵쿵 뛰며 외쳤다. 무희가 슬쩍 두 사내에게 윙크했다.
"잘 살펴. 무릎이랑 허리랑!"
뚱보 뒤에 앉은 사내가 무대를 쳐다보지도 않고 낮게 읊조렸다. 석범은 사내의 날렵한 콧날과 윗니에 물린 아랫입술을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사내가 석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로와 취기로 뒤범벅인 사내의 헝클어진 머리와 충혈된 눈이 슬퍼보였다. 석범이 술잔을 턱까지 들어 흔들자 사내가 외면했다.
무희는 수면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또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강렬함과 부드러움이 시시각각 섞였다. 날치처럼 높이 튈 때는 가슴과 엉덩이가 엇갈려 맴돌았고, 손가락을 곧게 펼 때는 손목이 부풀었으며, 발끝이 허공을 연속으로 찌르고 내려설 때는 둥근 물그림자가 쿠션처럼 아래를 받쳤다. 칼날인 듯 솜이고 창날인 듯 뭉게구름이었다.
앨리스가 환호하는 손님 틈에서 석범을 겨우 발견하고 다가섰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예쁜 문신까지 바다에 딱 어울리는 컨셉입니다."
무희의 목덜미로 금붕어 한 마리가 쏘옥 올라왔다. 색깔과 움직임 그리고 모양까지 자동 변환되는 디지털 입체 문신이다. 노래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품종이 등장했다. 눈알이 크고 튀어나온 특눈금붕어[출목금]부터 등지느러미가 없는 난금붕어[蘭鑄], 공작을 닮은 꼬리지느러미를 펄럭이는 지금붕어[地金]까지. 무희의 춤사위가 격렬할수록 금붕어도 활기찼다.
"저기, 꼬리들!"
석범이 턱짓을 했다. 앨리스의 시선이 무희의 엉덩이에서부터 미끄러져 파도가 몰려가는 입구로 향했다. 클럽을 나가는 사내들의 뒷모습이 잡혔다. 엉덩이 밖으로 튀어나온 꼬리가 흔들렸다. 사이보그 반인반수족이다.
"원숭이, 말, 개, 소! 이런!"
동화책 읽는 유치원생처럼 또박또박 그들의 특징을 짚던 앨리스가 후다닥 달렸다. 클락의 기억에서 끄집어낸 밀무역상들의 하반신도 원숭이, 말, 개, 소였다.
바디 바자르를 빠져나온 석범과 앨리스가 등을 지고 위아래 중심 거리를 살폈다.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체격의 행인들을 돌려세웠다. 꼬리가 없었다.
50미터 쯤 걸어 내려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썅, 이것들 다 어디로 간 거야? 흩어져서 찾죠. 제가 왼쪽을 맡겠습니다."
앨리스가 바삐 뛰어갔다.
석범은 격발용 장갑부터 고쳐 꼈다. 권총이 내장된 장갑은 엄지와 검지로 총신을 고정시키면 언제든지 사격이 가능했다.
"자 동 탐 색!"
또박또박 말했다.
자동 탐색이 코딩된 탄환은 탄도와 속력을 조절하며 표적물의 약점을 스스로 찾아서 날아간다. 한층 강화된 방탄복에 대처하는 최신 기술인 것이다.
석범은 샛길을 택했다. 중심 거리는 사내 넷이 한꺼번에 숨기엔 너무 곧고 넓다.
샛길은 꺾임이 잦고 그 각도가 컸다.
개꼬리가 'ㄷ' 자로 꺾이는 두 번째 지점에서 튀어나왔다. 뒤에선 소꼬리가 가슴을 세운 채 다가섰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 실레노스처럼 네 발로 걸었다. 개꼬리가 물었다.
"마음에 들어?"
"뭐가?"
석범은 싸라기눈에 젖은 차가운 벽에 등을 댄 채 좌우를 노려보았다.
"여기가 네 놈 묘지거든. 이왕이면 영원히 누울 사람 맘에 들어야겠지."
말꼬리까지 담벼락을 훌쩍 넘어왔다. 석범은 장갑 낀 손을 좌우로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원숭이꼬리는?
석범은 격투를 즐기진 않았다. 일의 잘잘못을 따져 누군가를 징벌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다.
"나는……."
격발용 장갑을 사용할 때는, 20세기부터 통용된 낡은 관례지만, 관등성명을 밝혀야 했다.
"보안청 소속 은, 석, 범 검사!"
말꼬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검산 줄 알면서도 날 죽이겠다고?"
"죽이고 살리고는 우리 맘! 사고팔고도 우리 맘!"
개꼬리가 각운을 살려 답했다. 말꼬리가 개꼬리를 이어받았다.
"은검사의 70퍼센트 천연몸은 기대 이상이더군. 훌륭해 정말! 보안청 소속 검사님과 형사님들 장기는 무지무지 비싸지. 세 배에서 열 배까진 더 뽑아. 일 년에 두 차례 씩 특훈을 견뎌낸 강철 체력에 프리미엄이 붙는 거야. 우린 고맙지 머."
그들은 가중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허튼 짓 그만 둬. 순순히 취조에 응한다면, 감히 형사를 죽여 장기를 밀매하겠다는 너희들 지껄임은 잊어주지. 스미스란 가명을 쓴 클락과 은초롱뱀을 두고 흥정을 벌인 과정만 조사하겠어."
소꼬리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뭔 소린지. 우린 장사꾼이야.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잡지 않는 게 우리들 상도지. 장사꾼과 손님이 어울렸으니 흥정이야 당연히 붙는 거고."
"클락은 신중한 놈이거든. 확실한 언질을 줬으니까 바디 바자르에 왔겠고. 너희들, 어떻게 유전형질연구소에 접근했지?"
"곧 죽을 녀석이 궁금한 것도 참 많네. 천당으로 보내달란 기도나 하셔."
말꼬리가 제자리에서 강철발굽을 울렸다.
석범은 양팔을 엇갈려 뻗으며 말꼬리와 소꼬리의 머리와 가슴을 향해 총을 각각 두 발 씩 쏘았다. 그들은 피하지 않고 날아오는 탄환을 노려보기만 했다. 가슴에 걸린 토성 문양 목걸이들이 동시에 번뜩이자, 갑자기 탄도를 수정한 탄환이 말꼬리와 소꼬리에 들러붙었다.
"히힝, 귀여운 짓만 골라 하는군."
말꼬리가 탄환이 붙은 꼬리를 흔들며 이죽거렸다.
빛나는 토성의 고리가 강력한 전자막을 형성하여 목표물 자동 탐색을 방해하고 탄환을 꼬리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어딜 씹어 삼켜줄까? 머리부터 으깨는 게 순서겠지?"
개꼬리가 끈적끈쩍한 침을 질질 흘려댔다.
석범이 토네이도 강철구두를 굴렸지만 가속도가 붙지 않았다. 발을 떼고 다리를 드는 것이 바위를 옮기듯 힘겨웠다. 그 역시 토성 목걸이 탓이다.
"새로 나온 슬로우 슬로우 댄스인가?"
소꼬리가 질주하여 석범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비껴 맞았기에 망정이지, 정면으로 부딪혔다면 갈비뼈가 통째로 부러졌을 것이다. 개꼬리와 말꼬리가 함께 달려들었다. 석범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철썩 척 쏴아아!
그 순간 파도 소리를 이끌고 누군가 끼어들었다.
개꼬리와 말꼬리를 회목치기와 뒷발차기로 단숨에 제압하고 덜미걸이로 소꼬리를 넘어뜨렸다. 그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덤볐지만 다시 가슴과 머리를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개꼬리와 말꼬리가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거기 서!"
석범이 외쳤다. 가속도가 붙지 않는 탓에 추격이 어려웠다.
"너희들은 누구야? 정체가 뭐야?"
석범이 쓰러진 소꼬리의 머리를 잡아챘다. 소꼬리가 대답 대신 비웃음을 흘리면서 토성 목걸이를 벗어 담 너머로 던졌다. 꼬리에 붙었던 탄환 두 발이 소꼬리의 미간과 왼 가슴을 관통했다. 전자막이 사라지자 탄환들이 처음 탐색한 목표지점을 찾아간 것이다.
"안 돼!"
석범이 소꼬리를 끌어안았지만, 반인반수 사이보그는 이미 절명한 뒤였다.
"따르세요. 여긴 위험해요."
파도와 함께 나타나서 석범을 구한 이가 앞장을 섰다. 성별을 구별하기 힘든, 인공 성대가 만든 목소리였다. 뒷목에서 묶어 내린, 가닥가닥 꼬인 머리카락이 부채꼴처럼 허리를 감쌌다.
샛길을 벗어나기 전, 석범이 뒤에서 팔목을 붙들었다. 생명의 은인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그녀였다. 금붕어 문신이 돋보이는 바디 바자르의 검은 무희.
"어서 이 거리를 벗어나세요. 반인반수족은 받은 만큼 돌려준답니다, 돈이든 주먹이든."
그리고 썰물처럼 바디 바자르로 뛰어갔다. 석범이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이름을 묻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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