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닷컴 신간소개]‘사고전서’는 청나라판 분서갱유인가

  • 입력 2009년 2월 2일 17시 27분


◇사고전서/켄트 가이 지음·양휘옹 옮김/408쪽·2만8000원·생각의 나무

1772년 2월 2일, 청나라의 호학군주 건륭제는 각 성과 현의 관리들에게 천하의 책을 수집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건륭제가 누구인가. 바로 조부 강희제와 함께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의 황금기를 이어간 황제가 아닌가. 만주족이 비로소 중국 대륙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그는 대륙의 모든 책을 한 데 모으는 사업에 착수한다.

황제의 명에 따라 1772년 편찬소가 설치되고 대륙의 모든 서고에 보관된 책에 대한 조사가 일제히 이뤄진다. 꼬박 22년에 걸쳐 ‘동양사상의 기념비적 집대성’이라는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탄생한다. 1만680종의 책을 경(經·경전)·사(史·역사)·자(子·철학)·집(集·문학)으로 나눠 해제를 작성하고, 이 가운데 3593종을 3만6000여 책으로 다시 필사했다. 조선의 호학군주 정조는 이 사고전서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라 사신들에게 구해오도록 명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탈자에 상벌 제도를 도입하여 관리 감독했으며 원고를 자신이 직접 검토할 정도로 매진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족에 대해 경멸적인 내용이 담긴 2400여종의 책들이 파괴됐고, 400~500종이 황제의 명에 의해 개정 됐다. 이 때문에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사고전서의 편찬은 청나라판 ‘분서갱유’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워싱턴 대학의 동양사 권위자인 켄트 가이 교수는 “분서갱유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고전서의 편찬 과정을 통해 건륭제 시대의 학자와 국가 제도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사고전서 四庫全書’에서 사고전서 편찬 사업과 뒤이어 온 검열운동은 “한족 엘리트와 만주족 통치자의 협력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당시 지식인들이 불온서적을 소지한 사람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신고했으며 금서의 내용을 비난했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갈등을 없애려 검열을 이용했다. 결국 검열운동은 어느 한쪽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상호작용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켄트 가이 교수는 “사고전서의 편찬 사업은 청조정의 업적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작품이자, 18세기 학술의 수준과 생명력을 입증한 것”이라며 “건륭조 정부는 명말과 청조의 여러 황제들이 회피하던 목적을 달성했고 이는 결코 과소평가 되어선 안된다”고 말한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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