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서도 소리꾼 박정욱 씨 “애절한 북녘 굿가락 지켜야죠”

  • 입력 2009년 2월 5일 02시 45분


그는 원색의 화려한 무복(巫服) 12벌 가운데 서 있었다. 푸른색 무복을 스팀다리미로 문지르는 박정욱(44) 씨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1일 서울 예술의 전당 분장실. 박 씨는 2시간 뒤 무대에 오르는 ‘황해도 철물이 굿’(철이 바뀌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 신을 섬기는 굿)을 준비하고 있었다. 1월 31일과 2월 1일 이틀간 열린 공연에서 700여 객석이 거의 다 찼다.

“여기 오신 분들은 아무 데서나 업혀가거나 험한 꼴 당하지 않게 해 주시고∼.” 그는 연쇄살인사건, 경기불황 등을 사설에 담아냈다. 악귀를 쫓고 복을 받기를 빌어 줬다. 주로 중장년층인 관객들은 큰 박수와 웃음으로 답했다.

이번 무대를 위해 그는 사재 1700만 원을 털었다. 굿 같은 ‘비주류’ 공연은 지원과 협찬을 받기가 힘들다. 주변의 ‘굿 마니아’ 팬들이 이런 형편을 알고 “복 받게 해 줘”라면서 60만 원, 100만 원씩 찔러준 ‘격려금’이 큰 힘이다.

무대 위 붉은색 지화(紙花)가 가득 핀 나무 아래에서 그는 말했다.

“다음 굿 공연을 언제 할지 기약이 없네요. 해마다 딱 한 번만이라도 무대에 올렸으면 좋겠는데….”

서도소리(평안도·함경도 지역의 민요와 잡가 통칭) 공연과 교습, 대학 강의로 번 돈을 그는 굿판에 쏟아 붓는다. 왜? “재미있어서”가 첫 번째 이유이고, 다음으론 이 재밌는 우리 것을 알리며 지켜내고 싶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 출신, 몰락한 종가의 6남매 중 막내가 서도소리꾼으로 ‘무당 아닌 무당’의 삶을 사는 건 이북 출신 실향민 할머니들의 영향이 컸다. 고교 중퇴 뒤 무작정 올라온 서울에서 우연히 서도소리 인간문화재 김정연(1913∼1987) 선생을 만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83년 잠실 석촌호수에서 자그마한 할머니가 뽑아내는 ‘수심가’에 푹 빠진 그는 선생의 집으로 소리를 배우러 다녔다. 15분 소리를 배우고 3시간 안마를 하면서 모자지간 맞먹는 정을 나눴다. 김 선생이 “우리 어머니가 널 보내줬나 보다”라고 할 정도였다.

박 씨는 서도소리를 제대로 ‘체화’하기 위해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인천으로 갔다. ‘오리지널’ 황해도 민요를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무대에서 듣고 불렀던 서도소리와 호흡법부터 달랐어요. ‘서도소리는 허무하고 애절하다’고 배웠지만 굿판에서 듣기 전에는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했다가 황해도 출신 무당 이선비(중요무형문화재 제90호 황해도 평산소놀음굿 예능보유자) 선생을 만나 철물이 굿을 배웠다. 무당 할머니들은 그를 손자처럼 예뻐하면서도 가끔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넌 다 좋은데 ‘예수쟁이’라서….”

만신 장보배 할머니의 팔을 베고 자기도 하면서 황해도 사투리와 생활, 정서를 체득했다. 평양 고려장 하직굿, 소놀음굿부터 황해도 굿상 차리기 같은 절차는 물론 의상, 그림, 지화 만드는 법까지.

“내 혼을 담아 이녁들의 복을 빌어 줄까∼.”

무대 위의 신명나는 굿 가락에 실린 그의 목소리는 소리에 빠져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노라’는 자기 고백처럼 들렸다.

하루 9∼10시간 풀타임 굿을 3시간 반짜리 무대용으로 압축해 보여 주느라 그는 땀투성이가 됐다. “홀로 길을 만들며 가다 보니” “일복이 터지다 보니” 소리꾼은 노총각이 됐다. 여자친구와 잘 지내다가도 결혼 얘기가 나오면 “굿, 그거 꼭 해야 돼?”라는 얘기를 듣기 일쑤였다.

2001년 서울 중구 신당동에 ‘가례헌’을 연 그는 매달 두 차례 국악 하우스콘서트를 열어 전통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돈은 필요한 만큼 벌지만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5만 원짜리 집에 산다. 후배와 제자들이 한 번이라도 더 무대에 설 기회를 만드느라 나가는 돈이 더 많다. ‘배부르면’ 제대로 된 소리가 안 나온단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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